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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七.烏江의 슬픈 노래

입력 | 2005-11-15 03:08:00

그림 박순철


임치성을 두고 한신이 이끈 대군과 가임(假任)된 재상 전광(田光)이 이끄는 성안 군민(軍民)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신이 되도록이면 군사를 다치지 않고 성을 떨어뜨리려는 바람에 싸움은 처음 뜻한 바와는 달리 날을 끌게 되었다. 급격한 공성전(攻城戰)에서 느긋한 포위전으로 전환시킨 때문이었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버텨낼 것 같던 전광이 마침내 임치를 내준 것은 한신이 성을 에워싸고 들이친 지 보름 만인 섣달 초순이었다. 전광은 겨우 5000밖에 안되는 군사로 열 배가 넘는 한신의 대군을 맞아 그토록 잘 싸우고도 남은 군사 3000을 고스란히 빼내 멀리 성양(城陽)으로 달아나 버렸다. 한신으로서는 이기고도 화가 날 만했다. 그러나 오히려 성난 장졸들을 달래 백성들을 다치지 못하게 하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임치성 안 왕궁 앞뜰에는 제왕이 삶아 죽인 역이기의 시체가 식은 가마솥 안에 담긴 채 버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본보기로 버려두었고, 나중에는 급하게 내몰리느라 미처 치울 틈이 없어 그리된 듯했다. 한신은 사람을 시켜 물러 처져 내리는 역이기의 뼈와 살을 거두게 한 뒤 좋은 관곽(棺槨)에 담아 정중히 장례 지내게 했다.

“역((력,역))선생 이기(食其)는 비록 유자(儒者)였으나, 누구 못지않은 맹사(猛士)였다. 그를 저리도 참혹하게 죽게 만들었으니, 이 일로 내가 치러야 할 값도 결코 헐하지는 않겠구나.”

역이기의 상여가 성문을 나가는 것을 보고 한신이 탄식하듯 말했다. 괴철이 곁에 있다가 태연히 받았다.

“참으로 매서운 선비는 죽음을 무릅쓰고 뜻하는 바로 내닫는 선비(사비·死士)입니다. 역 선생은 이미 떠날 때 우리 한나라를 위해 제나라를 얻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렇게 제나라를 거두었으니 유한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빌어야 할 사람이 오직 역 선생뿐만은 아니오. 창칼을 쓰지 않고도 제나라 70성을 얻었다고 좋아했던 한왕(漢王)은 어찌할 것이며, 역 선생의 아우 역상((력,역)商)은 장차 또 어떻게 볼 것이오?”

“천하를 도모하려는 이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대장군께서도 천하인(天下人)의 반열(班列)에 드시면 사정(私情)에 구구하게 변명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틈타 하는 말인지 괴철이 여전히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그렇게 받았다. 한신이 놀란 얼굴로 괴철을 쳐다보며 물었다.

“천하인의 반열에 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럼 나더러 우리 대왕이나 항왕과 더불어 천하를 다투기라도 하라는 것이오?”

괴철은 그래도 눈 한 번 깜빡 않고 한신의 말을 받았다.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아직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는, 문득 잊고 있는 것을 일깨워 주듯 한신에게 말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먼저 달아난 제왕 전광과 재상 전횡 등의 남은 세력을 쓸어 제나라부터 온전하게 평정해 두는 일이 급합니다.”

그 말에 한신도 내심으로는 미진한 대로 급한 일부터 처리했다. 곧 장수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인 뒤 미리 짜놓은 계책에 따르듯 군령을 내렸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