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8년 한양을 찾은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그 고개를 이렇게 묘사했다.
“홍제동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5리도 못 되어 하늘이 만든 관문 하나가 북으로 삼각산을 잇대고 있으니, 그 가운데로 말 한 필만 통할 만하여 험준하기가 더할 수 없다.”
모래재, 길마재, 모화현…부르는 이름도 다양했지만 근세에 와서는 ‘무악재’로 정착됐다. 북한산 인수봉이 마치 아이가 뛰쳐 나가려는 모양새라, 이 고개의 서쪽에 있는 산(오늘날의 안산)을 ‘모악(母岳·어미산)’이라 이름하며 아이(인수봉)를 달래려 했고 이에 따라 고개도 ‘모악재’로 불리다 ‘무악재’가 됐다고들 했다. 조선조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 터를 물색하고자 이 고개를 넘나들어 ‘무학재’가 됐다는 설도 있다.
서북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서는 관문인 이 고개는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호환(虎患)으로 악명이 높았다. 나라에서는 지금의 서대문 독립공원 자리에 유인막(留人幕)을 설치하고 행인 10여 명이 모이면 비로소 군사들이 이들을 호송하게 했다. 군사들이 호송료를 받아 챙기면서 ‘무악재 호랑이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는 말도 돌았다.
1966년 11월 19일 낮 12시, 수많은 민담과 속설의 소재가 됐던 이 고개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김현옥(金玄玉) 시장이 나란히 섰다. 폭 7m 2차로 도로가 나 있던 이 고갯길을 폭 35m 6차로로 확장 개통한 것이다. 세 사람은 박 대통령이 ‘무악재’라고 쓴 비석을 제막했다. 뒷면에는 고갯길 확장의 내력을 담은 비기(碑記)가 새겨졌다.
이날 동아일보는 ‘불광동 응암동 등 지역 주민의 교통 소통 외에도 서부 전선 및 판문점으로 통하는 군사도로로 중요한 몫을 하게 됐다’고 고갯길 확장의 의미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 고개가 ‘경평(京平) 고속도로’의 초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대표단도 이 고개를 넘었다.
1994년 경기 파주시 평야지대를 달려 서울과 문산을 이어 주는 자유로가 개통되면서 무악재에서 이어지는 ‘통일로’는 ‘경평 국도’로서의 의미를 대부분 잃게 됐다.
통일 시대의 경평 고속도로가 갖는 명예는 아마도 자유로 또는 이와 평행하게 달리는 도로가 차지할 것이다. 그래도 ‘외국 문물’이라면 무악재를 넘어서는 사신 행렬을 먼저 기억했던 500여 년의 세월은 언제까지나 이 고갯마루에 간직될 것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