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언 씨가 요즘 주로 일하는 곳은 연극 공연장이 많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다. 그의 시 세계는 이야기의 성격이 강하다는 평이 있는데 그는 “시 습작을 통해 희곡과 시나리오, 소설로 나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각 일간지가 신춘문예 마감일로 잡은 12월 9일이 다가오면서
수많은 문학 지망생이 막바지 열병을 앓고 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도전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지망생도 많다. 최근 첫 시집인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를 펴낸 최치언(35) 씨의 경우는 이 같은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의 문학적 소양에 대해 모르다가 뒤늦게 출발해 1999년 본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했다.
그 뒤 자기 관심 영역을 크게 넓혀 희곡과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장편소설을 완성시켰고, 이번에 첫 시집까지 냄으로써 ‘전업 작가’로서 안착한 경우에 해당한다.》
최 씨는 신춘문예 지망생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핸드볼 선수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스무 살 때 ‘이 길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서 공부를 시작해 신학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바로 군대에 갔다 온 뒤 생업에 뛰어들었다. 지하철이나 빌딩 공사장을 돌면서 종일 삽질을 한 적도 있다. 전기 용접 같은 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그는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등록했다가 우연히 문예 동아리인 ‘풀밭 동인’ 모집 포스터를 보고 “‘이거구나’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도대체 글을 쓸 수가 없어서 동아리에 들어가고 나서도 1년가량 한 편도 못 썼다”고 말했다. 이후 문학과지성사, 창비, 민음사, 세계사 등에서 펴내는 시인선 수백 권을 모조리 사서 읽기 시작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면서 시작(詩作) 메모를 했고, 거의 밤을 새워 가며 시를 읽고 썼다. 그는 “그때 너무 행복해서 힘든 줄도 몰랐다”며 “신춘문예 응모보다 나를 표현할 길이 생겼다는 기쁨에 들떴다”고 말했다.
그는 1998년 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는데 “이 많은 걸 정말 이 며칠 새 다 썼단 말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다작을 했다. 그는 “신춘문예 응모용 시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시를 쓰다보면 ‘이건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바로 내 거다’는 느낌이 오는 걸 발전시키려고 했다. 당장 완성을 못 시키더라도 착상을 계속 적어 나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자신 있다고 생각한 시 30편 정도를 주변에 읽혔다. 평이 좋게 나오자 이 시들을 15편 정도씩 나눠 두 일간지에 투고했다. 두 군데 모두 당선 통보가 오자 그는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이 중 본보를 택해서 당선 절차를 밟았다.
그는 “시와 달리 소설의 경우 무조건 많이 쓰라고 충고할 순 없을 것 같다”며 “한번 소재로 잡은 것은 끝마무리를 지을 때까지 놓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설 역시 ‘신춘문예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식대로 썼다고 한다. 한국의 인기 작가들보다는 중남미 작가인 가르시아 마르케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리오 바르가스요사의 소설을 좋아해서 응모작도 “마르케스적”이라는 평을 받은 작품을 냈다. ‘검은 콧구멍’이라고 불리는 광원이 입에서 피 묻은 석탄을 내뱉는 것으로 시작하는 우화적인 소설 ‘석탄 공장이 있는 시(市)에 관한 농담’이었다.
그는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계속 문인으로 살아남은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며 “당선보다 ‘글로 나를 표현하는 기쁨’을 목표로 삼은 게 결실을 거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춘문예가 끝나면 당선자들의 신작 시들을 묶은 책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때 습작을 열성적으로 해온 사람일수록 ‘나름의 역작’들을 많이 내놓기 때문에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 바깥에서 방황을 많이 했다. 그것들이 거름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고 말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