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이 된 신문사로서는 몹시도 곤혹스럽던 한 해였다. 김대중 정부가 강도 높은 언론사 세무조사를 강행하던 4년 전의 일이다. 2001년 1월 11일 당시 김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자 국세청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2월 8일 전격적으로 23개 언론사를 대상으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자본금 100억 원 이상의 법인은 원칙적으로 5년마다 한 번씩 정기 법인세 조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조사도 의례적인 정기조사의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대국민 설득용’ 설명도 뒤따랐다.
뒤이어 공정거래위원회가 팔을 걷어붙였고, 검찰이 칼을 빼들었다. 미운 털 박힌 신문사에 대해서는 소속 언론인의 개인 계좌까지 무차별로 뒤지는 탈법적인 뒷조사도 있었다. 거기에 맞장구치면서 신문사의 ‘비리’를 파헤치라는 응원군의 목소리도 드높았다. 친여 신문과 방송들은 이를 ‘언론 개혁’이라면서 크게 환영하는 여론몰이를 했다. 일부 ‘시민단체’가 가세해 정권이 표적으로 삼은 특정 신문을 규탄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독자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 메이저 신문들이 타격을 받아 신문시장의 판도가 바뀔 것이라는 성급하고 희망적인 전망도 나왔다.
언론사가 특권을 누릴 이유는 없다. 그러나 당시 언론사 세무조사는 언론 탄압이라는 의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3개월 예정으로 시작된 세무조사에 단일 업종 세무조사로는 최다 인력을 투입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자 조사 기간을 140여 일로 연장하면서 강도 높은 정밀조사를 진행했다.
이때에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이 가만있지 않았다. 해당 언론사 사주와 간부들의 통화 내용을 몰래 엿들었던 것이다. 전현직 국정원 간부와 실무 직원들에게서 확보한 진술 등 검찰수사 결과 최근 밝혀진 내용이다. 언론을 길들이고 탄압하기 위한 국세청과 국정원의 공조체제였다. 칼은 펜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례였다. 이리하여 공정위는 13개 중앙 언론사와 관계사 등 33개사에 모두 242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전과’를 올렸다. 검찰은 요란한 절차를 거치면서 신문사 사주를 구속했다. 방송은 연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한 시간 반 넘게 국세청의 조사 결과를 전국에 생중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한편 친여 시민단체가 등장하는 토론회를 마련하는 등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을 겨냥한 융단폭격을 가했다. 세무조사를 진두지휘하던 국세청장은 그 후 ‘공’을 인정받아 장관 자리로 승진했으나 곧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고 몸을 숨겨 국외로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권력이 휘두를 수 있는 칼이 얼마나 다양하고도 치명적인지 확실히 보여 준 한 해였다. 국정원이 도청으로 얻은 정보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국세청에 통보되는 걸로 그쳤는지, 검찰이 사주를 구속할 때 방증 자료로 활용됐는지,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까지 갔는지는 모른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증거는 없다 해도 우리는 안다. 국가의 모든 정보는 대통령에게 통한다. ‘정보는 국력’이고, 대통령은 그것을 장악하는 자리다. 대통령은 모든 정보를 합법적으로 또는 초법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강자다. 그러니 대통령이 도청을 몰랐다 하더라도 도청의 ‘악과(惡果)’가 어디로 갔는지는 자명하다.
김대중 정권의 세무조사에서 언론은 뜨거운 교훈을 얻었다.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언론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그의 후임 대통령이 언론이 자기를 핍박하고 집단괴롭힘을 가한다고 말했을 때 다가올 재앙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아야 했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 당해 본 언론이라면 ‘강자가 약자를 향해 던지는 고단수의 경고’라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현명함은 있어야 했다. ‘개혁’을 명분으로 내건 위헌적 요소의 신문법을 기어코 제정하고야 말았고, 특정 신문에는 기고나 인터뷰조차 거절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언론사상 일찍이 없었던 여러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도청은 없다는 다짐을 국민 앞에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도 은밀하게 도청을 한 이전과는 달리 현 정권은 도청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과연 국민이 믿어야 하나.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