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2일 낮 12시 반.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부부를 태운 리무진이 텍사스 주 댈러스 시의 엘름 가(街)로 향하는 커브 길에 접어들었다. 차는 시속 16km 정도로 속력을 낮추었다. 그때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고 군중에게 손을 흔들던 대통령이 쓰러졌다. 환호하던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4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설과 억측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 사후 대통령 직을 계승한 린든 존슨은 고등법원 판사인 얼 워런을 수장으로 한 ‘워런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사건의 조사를 맡겼다. 워런위원회는 이듬해 “사건은 공산주의자 리 하비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었으며, 어떤 배후도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케네디의 암살을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스왈드는 애초에 경찰관 살인 용의자로 붙잡혔다가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에 의해 대통령 암살범으로 지목된 뒤 기소됐다. 유치장으로 향하던 그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실에서 나이트클럽 운영자인 잭 루비에 의해 피살됐다. 루비가 수많은 경찰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오스왈드에게 접근했다는 사실도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끊임없는 의혹들은 결국 권부 내의 호전적인 군산(軍産)복합체 인맥이 미소(美蘇) 간의 긴장을 서서히 완화시켜 나가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사주했을 것이라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1991년)도 이런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사건 발생 30년이 흐른 1993년, 상당수의 비밀기록이 햇볕 속으로 나왔다. 당시 이들 기록을 정밀 검증했던 학자들이 “워런보고서는 대체로 정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케네디를 쏜 총알이 하나냐(일탄설), 둘이냐(이탄설)는 논란도 일탄설로 기울어졌다. 케네디의 머리에 맞은 탄환과 존 코널리 당시 텍사스 주지사의 팔목을 스친 탄환이 같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 그러나 아직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증언이 나와 주목된다. 당시 시카고의 마피아 두목이었던 샘 지앙카나의 사주로 대통령이 암살됐다고 지앙카나의 딸 앙투아넷 지앙카나(70)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장한 것.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가 승세를 굳힐 수 있도록 마피아가 경합지역인 일리노이 주 선거를 지원했으나,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오히려 마피아를 단속한 게 암살의 배경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 주장도 명확한 물증이 뒷받침되지 않아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윤정국 문화전문기자 jky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