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 오후 과천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는 수습 사무관들을 대상으로 한 노무현 대통령의 특강이 진행 중이었다. 한 사무관이 대통령의 건강관리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노 대통령은 "매일 아침 5시 5분전에 일어나서 그때부터 6시까지 요가체조를 한다"면서 이렇게 '고충'을 토로했다.
"요가 같기도 하고 국선도 같기도 한데, 요가라고 하려니까 요가 하는 사람들이 '당신 무슨 그것이 요가냐' 할 것 같고, 국선도라고 말하려고 하니까 '그런 국선도가 어디 있어' 이럴 것 같아 대답하기 곤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좌중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국정현안과 과제를 챙기고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는 중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대통령직. 하지만 빡빡한 일정과 치열한 고민 속에서도 대통령은 곳곳에 웃음을 심어놓는다. 국정의 윤활유, 대통령의 농담과 유머를 모아봤다.
▼손녀에게 희망이 있다면…▼
2004년 5월 연세대학교 리더십센터 초청 특강에서였다. 한 학생이 대통령의 어린시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아마 제가 제일 관심을 가졌던 것은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멋지게 보람 있게 가치 있게 살기 이전에 삶에 대한 불안 없이 살고 싶었습니다. 시대가 여러분과 좀 달라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던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 뭐 했냐? 사랑하고, 아이 갖고…. 지금은요, 손녀가 참 귀엽고 예쁩니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할아버지로서 희망을 피력했다.
"뻔하지요. 아무리 예뻐 봤자…, 한계가 있지요. 저를 보고 상상을 하십시오. 제 희망은, 저보다 예뻤으면 좋겠다…."
▼"모델은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2004년 7월 국정과제회의 참석자 오찬. 나소연 서천군수가 대통령이 여름철 주요행사 때 서천군에서 만든 모시옷을 입어달라는 '건의사항'을 밝혔다.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모시의 우수성을 알리고, 새로운 천연소재인 모시가 앞으로 세계적인 상품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몸소 실천해 달라"는 것.
대통령이 흔쾌히 제안에 응했다. "모델은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국제회의 같은 때도 있겠지만 또 한산이나 서천군에서 따로 서울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든지 하면 모시옷을 입고 30분 동안 걸어 다니는 정도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한복의 태가 잘 나는 사람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한복의 태가 잘 난다는 등의 말에 여기저기서 새나오던 웃음이 대통령의 다음 말에 이르러 다 터져버렸다. "그리고 뭐, 돈이야 안 주겠지만, 입었던 옷은 제가 안 갈아입고 그냥 그대로 올라가도 괜찮도록 그렇게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명검사, 임시대위, 부대장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성씨가 특별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시원찮은 검사라도 성이 명씨면 '명검사'가 되고, 아무리 대위가 되도 성이 임씨면 맨날 '임대위', 임시 대위가 되고 또 대장이 되도 성이 부씨면 '부대장' 밖에 못하는 그런 성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통역에게 슬쩍 물어봤다. "(지금까지 얘기한) 이걸 번역할 수 있나?" 통역된다는 답이 왔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굿맨은 (부모님이 주신) 아주 좋은 선물입니다." 난데없이 성(姓) 이야기는 왜 나왔을까.
이날 자리는 지난 6월 주한미군 고위 장성 초청 오찬석상이었고 연합사 기획참모부장의 이름은 존 굿맨이었다.
▼별걸 다 궁금해 하는 대통령▼
지난 6월 대통령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재정 수석부의장이 "7월 1일 자문위원 위촉장을 주셨고, 오늘 오신 분들은 자문위원이시면서 동시에 부의장, 상임위원장을 맡으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 그러니까 위촉이 아니고 임명입니다. 그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대통령이 질문을 던졌다. "전국 각지에서, 해외에서 오시고 그랬는데, 제일 궁금한 게, 차비는 주는가?"
참고로 김희택 사무처장은 "오늘은 여비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대통령, 허락하다▼
지난 3월 열린 민원제도개선보고대회. 국무조정실 조영택 기획수석조정관이 보고 중이었다.
"청와대 제도개선협의회를 운영하고 계신데, 허락해 주신다면 국무조정실에서 행정자치부를 간사 부처로 해 다수 부처와 관련된 민원·제도 개선을 조정·협의·해결하기 위한 상설 시스템을 운영해 나가는 것을 검토했으면 합니다."
대통령의 답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청와대 제도개선비서관 목 달아나는데요?"
조 조정관이 말했다. "그래서 허락해 주신다면…."
대통령의 다음 말에 웃음은 더 커졌다. "그렇게 하십시오."
▼이 산이 아닌가벼?▼
지난 8월 중앙지 정치부장단 오찬. 언론에 대한 대통령의 제언이 계속됐다.
"정책 대안에 관한 기사는 전체를 발췌해 해당 부처 의견뿐 아니라 우리 청와대 참모의 의견, 내 의견, 모든 사람의 의견을 전부 각주로 달아서 토론 붙이고, 정책의 채택 가능성 등을 다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런이런 정책을 하면 고유가에 대한 국가 대책으로서 아주 좋은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안 하냐?'라고 지적하면 '늦었습니다' 하고 얼른 제가 받겠습니다. 그런데 아무 대안도 없이 '정부 대책이 없어서 한심하다'…. 이런이런 대책이 있는데 채택하지 않아서 한심해야지,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 다 아는데 그렇게 보도하는 게 적절한가…."
대통령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오늘 경제부장들 아니네?"
▼너무 젊게 보이셔서 그만▼
대통령이 올해 제60회 식목일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문국현 선생님은 기업을 하시면서 나무를 많이 쓰니까 나무를 또 많이 심습니다. 나무를 아주 많이 심어서 아주 성공하신 분이고, 우리 장일환 선생님, 김규석 선생님, 또 이건훈……." 잠시 끊어졌던 말이 계속됐다. "'선생님' 하기엔 연세가 그렇게 안 많아 보이는데 어쩌죠?" 이건훈 부여 밤영농조합 대표의 얼굴이 다른 참석자들에 비해 한결 젊었기 때문.
곁에 있던 김규석 임업후계자협회장이 이건훈 대표의 나이를 밝혔다. "여든넷입니다." "예?" 대통령의 확인에 김규석 회장이 거듭 설명했다. "여든넷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아, 예, 선생님." 머쓱해진 대통령이 다시 인사했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말. "제가 까딱하면 말 놓을 뻔했는데요?"
▼"더 대우할 게 없었는데 다행입니다"▼
지난 10월 자크 로게 IOC 위원장과 만찬에 앞서 촬영을 위해 사진기자들 앞에 선 대통령. 플래시 행렬이 좀체 끊어질 줄 몰랐다.
결국 대통령이 한 마디. "이제 많이 찍었죠? 우리 사진기자들은 끝나는 시간을 정해 주지 않으면 끝없이 찍고 싶어 해요. 아마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면 오늘 저녁 내내 찍을 것 같아."
이어진 환담 도중 자크 로게 위원장이 부친의 '한국전쟁 참전설'에 대한 '바로잡기'에 나섰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1907년 태생이시기 때문에 당시에 싸우시기에는 나이가 많이 드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 한 분이 참전하셨습니다."
'수습'에 나선 대통령이 "아주 다행"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로게 위원장의 직계 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라면 제가 로게 위원장을 두 배로 이렇게 깍듯이 존중하고 대우를 해야 되는데, 지금보다 더 대우하는 방법이 없는데, 이걸……. 방법이 없어서 아주 곤란할 뻔했습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