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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수험생이여, 떠나자! 잠시 경쟁에서

입력 | 2005-11-24 03:01:00

영화 ‘엘리자베스 타운’ - 사진 제공 UIP코리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 여러분, 혹시 ‘블루오션(Blue Ocean)’이란 말을 아세요? 한마디로, 요즘 뜨고 있는 경영전략 이론인데요. 경쟁이 들끓는 ‘레드오션(Red Ocean)’의 세상에서 벗어나 자기 가치 창출을 통해 저 푸른 바다처럼 경쟁 없는 무한 가능성의 시장을 연다는 게 이론의 핵심이죠.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고요? 지난 주말 극장에서 무심코 본 영화가 불현듯 ‘블루오션’이란 단어를 제 가슴속에서 끄집어냈기 때문이죠. 그 영화는 바로 ‘엘리자베스 타운’입니다.

미국 굴지의 신발회사 연구원인 드류(올랜도 블룸). 그는 8년간 자신이 일로매진으로 연구해 선보인 신발이 시장에서 외면 받아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자 해고당합니다. 자살을 결행하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리죠. “회색빛 하늘을 푸르게 바꿔요∼”라는 남의 속도 모르는 유행가가 벨소리로 속절없이 흘러나오고, 전화를 받은 드류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골 고향으로 떠난 드류는 새로운 인생에 눈뜨게 됩니다.

그때까지 드류의 인생은 ‘레드오션’이었죠. 오직 경쟁에서 이겨 성공해야겠다는 강박만이 지배하는 삶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세상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결심했던 거죠. 드류는 ‘레드오션’에서 성공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절감하며 이렇게 되뇝니다. “성공은 위대함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성공 자체를 숭배한다는 걸 깨달았다.” 삶의 기쁨이란 어쩌면 솜사탕을 들고 있는 아이의 환한 표정처럼 아주 작은 데 있는지 모릅니다. 고향마을로 가는 길을 잃고 몇 시간째 길을 헤매던 드류는 ‘엘리자베스 타운’이란 이정표를 보는 순간 환호작약하며 난생 처음 짜릿한 기쁨을 맛보니까요.

그가 만난 엘리자베스 타운의 사람들이야말로 ‘블루오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수 년 만에 만난 고모는 고인이 된 친척의 사진을 드류에게 보여 주면서 “알코올 중독에다 젖꼭지도 세 개였지”라고 말하며 회상에 잠깁니다. ‘레드오션’을 사는 드류에겐 듣기 민망한 얘기지만, ‘블루오션’을 사는 고모에겐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죠.

아버지의 시신을 쳐다보던 드류가 문득 “어, 아버지의 표정이 뭐랄까, 너무…천진난만하잖아” 하면서 의아해 하는 대목은 그가 마침내 ‘레드오션’의 껍질을 벗고 나와 ‘블루오션’을 향한 삶의 모퉁이에 서 있음을 보여 주는 징후이기도 합니다.

‘레드오션’의 세계에서 죽음은 슬픔이고 결별이고 안타까움이지만, ‘블루오션’의 공간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오랫동안 남처럼 잊고 지냈던 피붙이들이 만나 따스한 위로와 정을 나누며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실감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하니까요.

추도식이 열리고, 평소 아버지가 즐겨 하던 말씀이 현수막이 되어 걸리죠. 그 글귀는 이렇습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누군가가 정해 놓은 정답을 알아맞히기 위해 자신을 학대하고 소모하는 ‘레드오션’의 인생을 살던 드류는, 정답이 없는, 혹은 정답이 아예 무의미한 ‘블루오션’의 인생이 있음을 깨닫게 되죠.

시험 결과는 어땠나요? 지금쯤 기쁨에 겨울 수도 낙담에 빠졌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어쩌면, 이건 모두 당신이 ‘레드오션’에 갇혀 있어 생겨나는 부질없는 감정의 파편일지 모릅니다. 드류의 깨달음처럼, 세상을 숨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로도 우린 얼마나 아름다운 신의 축복을 입은 걸까요. 달리기를 잠시 멈추세요. 눈을 감으세요. 당신의 눈앞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어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