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문전성시인 파리 오페라 인근의 대형 H&M매장. 파리=김현진 사외기자
최근 파리에선 1년 만에 또다시 ‘저가(低價) 럭셔리 패션’ 바람이 불고 있다. 주인공은 영국의 팝스타 폴 매카트니의 딸이자 유명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35).
그는 최근 대형 패션업체 ‘H&M’과 공동 작업으로 40가지 의상을 디자인해 유럽과 미국에서 일제히 판매했다. ‘스텔라 매카트니 for H&M’이란 이름으로 그가 디자인한 저가 럭셔리 패션 아이템들은 판매 첫날부터 매진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저가 럭셔리 패션은 유명 디자이너와 대형 매장이 공동으로 럭셔리 패션을 한정 제작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 디자이너들의 옷을 슬쩍 변형해 먼저 시장에 내놓는 데다 가격도 저렴하다.
H&M은 1947년 창립된 스웨덴 패션 브랜드로 미국과 유럽 21개국에서 1200개의 대형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스페인의 ‘자라’ ‘망고’와 함께 소비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생산 라인에 반영해 판매하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
스텔라 매카트니 라인으로 꾸며진 쇼윈도. 파리=김현진 사외기자
‘스텔라 매카트니 for H&M’은 성공이 어느 정도 예견됐다. 지난해 이맘때 샤넬과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카를 라거펠트가 ‘라거펠트 for H&M’이란 이름으로 내놓은 제품들은 판매 두어 시간 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인기 디자이너의 ‘작품’이 저렴한 가격에 나오자 소비자들이 앞 다투어 달려온 셈이다.
스텔라 라인의 가격은 20유로(약 2만5000원)대에서 150유로(약 19만 원)까지 다양하다. 이는 구찌 그룹에 속해 있는 매카트니 자신의 이름을 붙인 브랜드 옷의 20%에 불과하다.
스텔라 라인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판매 첫날부터 뜨거웠다. 매장 앞에 줄을 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간 뒤 옷을 한아름 골라 탈의실로 달려가는 여성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인기 아이템들은 하루 만에 다 팔리기도 했다.
여성들이 저렴한 가격에만 열광하는 게 아니다. 샤넬, 크리스티앙 디오르, 이브생 로랑 등 ‘명품 패션’의 VIP 고객인 나탈리 브로하트(45) 씨는 “스텔라의 옷은 모두 좋아한다”며 “매장에서 다섯 시간 있으면서 직원들이 새로운 아이템을 꺼내 놓을 때마다 몇 벌씩 구입했다”고 말했다.
저가 럭셔리 패션이 소량 생산되는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점을 감안해 ‘사업용’으로 구입하는 이들도 있다. 인기 아이템은 이베이 등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2, 3배 뛴 값으로 거래되고 있다.
H&M 측은 스텔라 라인의 옷을 구입하면 몽환적인 분위기의 동물이 그려진 분홍색 포장지로 정성스럽게 싸 준 뒤 스텔라 라인 문구가 적힌 옷걸이도 주는 등 고급 브랜드의 판매 전략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스텔라 라인 디자인의 특징은 ‘풍성한 상의’와 ‘타이트한 하의’다. 이 특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넉넉한 사이즈의 니트 웨어와 몸에 달라붙는 바지 라인은 단번에 베스트 셀러가 됐다. 그러다 보니 생토노레, 에티엔 마르셀 등 파리의 유행 거리에서 매카트니 라인의 같은 옷을 입은 여성들도 자주 볼 수 있다.
매카트니는 한 인터뷰에서 “평소 옷값의 거품에 불만이 많았다”며 “H&M과 손잡고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옷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H&M은 유명 디자이너와의 작업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다른 제품의 판매도 촉진하는 홍보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지난해 라거펠트는 “앞으로 절대 H&M과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H&M이 자신의 라인을 적게 생산하는 바람에 “샤넬과 펜디를 살 만한 여유가 없는 소비자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취지가 흐려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또 자신의 옷은 날씬한 이들을 위해 디자인했는데 H&M이 큰 사이즈도 파는 바람에 이미지가 훼손됐다고 밝혔다.
라거펠트든 매카트니든 두 사람은 ‘럭셔리’ 디자이너의 희소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대중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 사이에서 수없이 저울질을 했을 것이다.
매카트니는 “H&M과의 공동 작업이 일회성에 그칠 것이냐”는 질문에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 이름을 딴 브랜드 ‘스텔라 매카트니’의 역사가 짧으므로 우선 그 이미지부터 구축해야 한다”며 분명하게 답하지 않았다.
파리=김현진 사외기자 kimhyunjin517@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