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과 2005년(1∼9월)의 계층별 월평균 소득을 보자. 1분위 계층(소득이 가장 낮은 20%)은 76만 원에서 82만 원으로, 2분위 계층은 169만 원에서 180만 원으로 늘었다. 소득증가율은 각각 7.9%와 6.8%에 그쳤다. 반면 5분위 계층(소득이 가장 높은 20%)은 537만 원에서 597만 원으로 10.9% 늘었다. 다섯 계층 가운데 최고 증가율이다. 저소득층은 공적(公的) 원조, 기부 등 이전소득으로 버티고 있다. 1분위 계층이 도움을 받는 이전소득은 30.5%나 늘었다. 그런데도 소득 하위 30% 가구 가운데 50.7%가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은 서민층으로, 서민층은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추세가 가속돼 왔다. 근로소득세 면세점(연소득 2000만 원) 이하의 저소득 근로자는 1998년 430만 명에서 지난해 643만 명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전체 근로자 가운데 비과세 대상자는 40.7%에서 50.7%로 증가했다. 근소세를 내지 못하는 근로자가 6년 동안 해마다 35만 명꼴로 증가한 것이다. 상위 20%의 소득은 크게 늘고 하위 80%의 생활 형편은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소득의 ‘20 대 80’ 현상이다.
물론 ‘80%의 실패’를 몽땅 노무현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소득의 양극화(兩極化) 현상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심화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배와 복지를 내세운 참여정부 출범 이후 빈부 양극화가 더 심해지고 고착(固着)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는 성장잠재력에도 못 미치는 저(低)성장으로는 분배 개선이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분배론자들은 분배정책을 강화하지 않으면 언제 아랫목의 온기가 윗목에 전해지겠느냐고 하지만 강물이 높아지면 모든 배가 뜨는 법이다. 반대로 저성장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인위적인 분배정책에 매달리면 단기적으로는 격차 완화 효과가 생길지 모르지만 결국 더 나누어 줄 파이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스 페터 마르틴(오스트리아)과 하랄트 슈만(독일)은 10년 전 공동 저서 ‘세계화의 덫’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범지구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오로지 20%의 사람들만이 좋은 일자리를 갖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으며 나머지 80%는 실업자 상태 또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싸구려 음식, 그리고 매스컴에서 뿜어대는 상업적 대중문화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가야 한다. 이들 대다수는 소수가 생산해 내는 부(富)에 빌붙어 먹고살아야 한다.” 이른바 ‘20 대 80의 사회’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속에서도 양극화 추세를 보이지 않는 아일랜드, 덴마크, 네덜란드 같은 선진국이 있고 중진국과 개도국도 나라마다 양극화의 정도가 다르다. 따라서 세계화 자체를 양극화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세계화와 양극화를 하나로 묶어 문제 삼는 것은 오히려 왜곡된 평등주의에 영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세계화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양극화를 극복한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과 교육개혁, 교육-고용-복지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꼽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소득불균형이 심한 나라가 된 이유는 자명(自明)하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래 계속돼 온 잠재성장률 이하의 저성장, 정보화 지식산업시대에 걸맞지 않은 하향평준화 교육, 끊임없이 분열을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 리더십으로 인한 사회세력 간 연대(連帶)의 약화 등이 요인이다. 이런 악재(惡材)가 중첩되고 계속되는 한 양극화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양극화 해소는 국가 능력의 문제다. ‘대통령감’으로는 부족하다는 대통령과 ‘젊다기보다는 어리다’는 참모들의 미숙한 국정 운영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양극화로 몰아간 첫째 원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고 한다. 말장난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