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 쌀 재협상이 무르익고 있을 때 동아일보에 ‘정부 쌀 재협상, 불신만 키운다’라는 글(2004년 11월 15일자 참조)을 쓴 적이 있다. 그 협상안의 국회 비준을 전후하여 남녀 농업인들이 잇달아 목숨을 잃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생령들이 죽어갈까 두렵다. 누가 무엇이 순박한 농업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WTO건 자유무역협정(FTA)이건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계층과 집단이 있고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계층이 있다. 뭉뚱그려 표현해 ‘국익’이라고 하지만 승자들의 이익은 아주 큰 반면, 패자와 탈락자에게는 살길이 아득하다. 그래서 우선 농민들을 살려 놓는 정책과 대책이 필요하다.
우리 쌀값이 국제 시세보다 4배가량 높지만 이는 한국 농민이 못나고 게으른 탓이 아니다. 오히려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 땅(논)값이 미국의 15배, 호주의 30배, 사회주의 중국의 200배나 된다. 그 결과 땅값(토지용역비)이 쌀 생산비의 44%나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근본 원인이다.
한국산 쌀의 생산비는 미국 캘리포니아산보다 3.9배쯤 높지만 생산 비 중에서 토지용역비를 빼고 비교하면 1.8배가량 높다. 이 땅값 때문에 규모를 어지간히 키워 봐도 경제교과서에 나오는 ‘대규모의 유리성(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은 별로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 좋은 예가 세계에서 쌀 농장으로 가장 컸던 충남 서산의 현대아산농장이다. 340ha(약 100만 평) 넓이의 땅에 비행기와 트랙터로 농사를 지었지만 채산성이 낮아 지금은 조각내어 소규모 가족농들에 팔려 나갔다. 역대 정부의 천문학적인 농업구조 개선, 규모화 정책이 외환위기를 만나 좌절을 보게 된 이유도 이 같은 한국 농업의 구조적 함정 때문이다.
따라서 WTO 체제하 향후 농업정책은 가격경쟁이 아니라 비(非)가격 분야의 국제경쟁력부터 높이는 방향이 되어야 옳다. 이를 위해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인 높은 생산력을 지속하면서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품질과 안전성, 그리고 가공 유통 구조를 개선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부정책을 통째로 불신하는 성난 농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소한도의 합리적인 식량자급 목표를 법제화해 실천해야 한다. 쌀 협상 내용도 부대조건까지 공개해 정부에 대한 불신을 씻고 피부에 닿는 정책을 도출해야 한다.
현재 농민의 목을 죄고 있는 부채 문제에 대해서도 대책이 필요하다. 우루과이라운드(UR)와 외환위기 이후 잇따라 전개된 각종 통상협정의 주름살이 농가 부채 누증(累增)으로 나타났으며, 부채 및 이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농가 경제의 정상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외환위기 때 기업 부실로 쓰러질 위기에 있던 은행에 공적 자금을 투입했던 것처럼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농민에게 고리채가 되어 있는 농협의 상호금융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6조 원가량인 악성 상호금융(연체이자율 연평균 15%) 빚을 공적자금으로 메울 것인지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현재 정부가 밝히고 있는 10년간의 농림예산 및 기금 119조 원은 이런 곳에도 쓰여야 한다.
끝으로 WTO가 허용하는 각종 지원 조치, 예컨대 유통, 무역, 판매촉진, 농촌의 환경, 경관, 지역균형개발, 건강, 생명, 문화전통, 교육 면에서 직접지불형식의 농가 지원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농가 소득 배가를 위한 각종 전통식품과 음료 및 술의 농가 자가생산 판매 제도를 선진국 수준으로 대폭 자유화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제 농업 농촌 농민을 포기할 것인가 살릴 것인가를 정부가 결단할 때이다. 왜냐하면 농민들이야 죽지 않으려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성훈 상지대 총장·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