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가을의 어느 날. 독일 뮌헨 근교의 그라펠핑에 있는 교포 작가 이미륵의 묘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전날 밤 있었던 낭독회의 피로와 시차가 겹쳐 나설까 말까 망설이던 일정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이미륵에 대해 전기적인 지식 외엔 아는 게 없었다.
그는 경성의대생이던 스무 살에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의 추적과 체포를 피해 중국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갔던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 섬세한 얼굴선과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선비풍의 사내. 독일 교과서에 실릴 만큼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독일어로 쓰인 그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묘원은 아름다웠다. 곧 다가올 조락을 모르는 채 꽃들은 마지막 향기를 내뿜었고 낡은 명주 천처럼 날깃날깃한 햇살이 굴참나무숲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묘원이 끝나는 곳에 그는 잠들어 있었다. ‘이의경’ ‘MIROK LI’ 묘비에 쓰인 두 개의 이름. 근처의 주유소에서 산 장미꽃을 들고 소풍을 나서듯 졸래졸래 걸어왔던 내 가슴속에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길지 않은 생을, 칼로 자르듯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의 무게였을까.
인적 없는 묘원을 걸어 나오며 나는 머지않아 내가 다시 여기 찾아올 것임을, 콧등이 아릿한 이 느낌을 오래 잊지 못할 것임을, 그 묘비 앞에 꽃 대신 작은 헌사라도 바치기 전에는 그에게서 놓여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했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 바로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악동인 사촌 수암에 대한 회고로 시작한 이 책은, 눈 내리는 망명지의 아침에 지난 가을 어머님이 며칠 앓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큰누님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섬약하고 조용한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난의 유랑 끝에 독일에 도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의 자전적인 기록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웃었고 또 그만큼 속으로 울어야 했다. 그가 그려 낸 풍경화 속에는 우리가 오래전 잃어버린 순수의 시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애로운 누이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 엄격한 선비였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 그리운 친구들, 잊을 수 없는 고향과 압록강의 정경들, 낯선 세계에 도착한 청년의 두려움과 설렘, 끝내 병이 되고 만 향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소박함과 온기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을 알맞게 붓고 장작불을 정성껏 지펴서 갓 지어 낸 더운 쌀밥 같은 글이었다. 베개로나 쓸 것 같은 딱딱한 독일빵을 씹으며, 흰 쌀밥 같은 글을 적어내리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문장 틈으로 떠올랐다. 조국을 잃고 유랑하는 이방인의 글에 독일인들이 아낌없는 찬사와 열광을 보내 주게 된 밑바탕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끝내 그가 잃지 않았던 고결한 선비정신과 고요한 동양성이 그들을 매혹하지 않았을까.
대학수학능력시험과 토플 점수가 인생관과 세계관의 지평이 되어 버린 청년들에게 이 아름답고도 슬픈 책을 권한다. 80여 년 전 내 또래 청년의 고뇌는 무엇이었나. 그의 사고는 얼마나 깊고 넓었던가. 한 개인의 삶과 운명에 개입하는 역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사색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미경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