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복원으로 주가가 오른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서울시장의 ‘캠프’에는 요즘 자문역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대학 교수들이 줄을 선다.
온갖 연줄을 동원해 찾아온 교수들이 놓고 간 명함이 100여 장에 이른다.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내륙운하 프로젝트, 남북문제 등 이 시장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하며 아예 ‘전략기획보고서’까지 만들어 보내오는 이도 있다.
이 시장 측 관계자는 “이들 중 상당수는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 쪽에 줄을 섰던 사람들이고, 일부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캠프에 참여했다가 자리를 챙기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차기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선호도 1위를 달리고 있는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 쪽의 사정도 마찬가지. 정책 개발에 참여하고 싶다며 문의해 온 교수가 8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열린우리당의 차기 대권 주자인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과 김근태(金槿泰) 보건복지부 장관 진영에도 오랫동안 자문에 응해 온 교수들이 적지 않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두 장관의 여론 지지도가 저조해서인지 아직 줄서기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캠프에도 많은 교수가 몰렸다. 대선 막판에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이 이슈가 됐을 때 “당장 미국에 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사과를 받아내라. 내가 주선하겠다”고 제안하며 접근한 교수도 있었다는 것.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지지도가 오르자 교수들이 밀물처럼 몰렸다가 거품이 꺼지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교수들의 줄대기는 정치권에 신선한 아이디어를 공급하는 창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선의로 보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줄을 대려는 교수들이 지나치게 많고 상당수는 때만 되면 상습적으로 정치권 주변을 맴돈다. 이런 교수들은 대개 연구와 강의에 불성실하기 마련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과 학생이 떠안게 된다.
특히 유력 대권 후보를 향한 줄대기가 횡행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집권 시 정부 고위직 진출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역대 대선 캠프에 참여한 교수들이 단번에 장관이 되는 등 출세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교수사회에 로또복권 당첨을 기대하는 것과 같은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줄대기 차원을 넘어 아예 교수직을 정치권 진입을 위한 발판으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다.
서울 A대학의 K 교수는 16대 총선에 이어 17대 총선 때도 의원들에게 자신의 저서를 돌리며 공천 청탁을 하고 다녀 국회 의원회관에는 방마다 K 교수의 책이 나뒹굴고 있을 정도다. 그는 올해 4·30 국회의원 재선거 때도 모 정당에 공천 신청을 했다가 탈락했다.
서울 B대학의 다른 K 교수는 휴직과 총선 출마를 되풀이하며 정치판을 누비다가 ‘수업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는 학생들의 반발에 부닥쳐 결국 사직한 일도 있다.
정부나 정치권으로 외도를 했더라도 이후 다시 대학에 돌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도 교수들이 기회만 되면 정치권 진출을 시도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제주 탐라대 교수 출신인 열린우리당 김재윤(金才允) 의원은 현재 휴직 상태. 탐라대는 출판미디어학과의 유일한 전임교수였던 그가 국회로 가는 바람에 올해부터 이 과의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있으며 재학생 20여 명의 강의를 위해 새로 강사를 고용했다. 김 의원은 휴직을 하면서 경영학과로 적을 옮겨놓아 언제라도 복직이 가능한 상황이다.
지난해 총선 때는 교수 출신으로 출마한 54명 중 29명이 휴직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거운동에 나서는 바람에 수업 차질이 빚어졌다. 이와 관련해 당시 경기 남양주갑에 출마했다 낙선한 건국대 건축공학부 안형준(安亨濬) 교수는 “선거운동 기간에도 강의를 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연구와 강의에다 지역구와 당 활동까지 다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총선 출마 교수의 결강과 휴직이 논란이 되면서 전국의 대학 총장 160여 명은 2004년 7월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에 진출하려는 교수들의 휴직을 보장한 교육공무원법 44조를 개정해 외부 정치활동을 마친 뒤 복직이 불가능하도록 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심재철(沈在哲) 의원이 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교수 출신으로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모두 25명. 그러나 교수직을 사직한 사람은 한나라당 김석준(金錫俊) 의원 등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 휴직 상태다.
(▲위의 이미지 클릭후 새창으로 뜨는 이미지에 마우스를 올려보세요. 우측하단에 나타나는 를 클릭하시면 크게볼 수 있습니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선거기여도 따라 ‘자리 나눠주기’▼
김영삼(金泳三) 정부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장관에 기용된 대학교수는 전체 장관 240명 중 47명(19.5%)에 이른다.
노무현 정부에선 전현직 장관 50명 중 11명(22%)이 교수 출신이다. 대통령비서실장, 국가정보원장, 공정거래위원장 등 장관급을 합하면 현 정부의 장관(급) 이상 전현직 고위직은 총 76명이고 이 중 교수 출신은 16명(21.1%)이다.
대학교수의 정부 고위직 발탁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정권은 정치적인 ‘코드’보다 실력으로 인정받거나 덕망 있는 교수들을 우선 기용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민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엔 대통령선거 기여도에 따른 논공행상식 ‘자리 나눠주기’가 많은 편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요즘은 대학교수가 정부 산하단체의 무슨 위원 하나 하는데도 선거 과정에서 맺은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에 기여한 교수들에게 주어지는 직책이 지나치게 ‘인플레’ 돼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대선 캠프에서 활약한 교수들은 정부 직에 기용될 때 당연히 장관(급)을 기대한다. 자신의 실력이나 경력을 떠나 장관이 아니면 홀대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거절하기 일쑤라는 것.
미국에서는 정부와 학계 간 교류가 잦긴 하지만 교수들이 실무 중간직에 기용되는 게 상례이지 곧바로 장관직 이상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정부에서 일한 적이 있는 한 교수는 “대학교수가 공직에 나간다면 국실장급이나 청와대 비서관급으로 들어가 바닥 경험을 쌓는 게 자신에게도, 국가에도, 대학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