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말하자면 내게 노무현 대통령은 참 고마운 존재다. 생전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까지 관심을 갖게 될 만큼 내 삶의 폭을 넓혀 준다. 이쯤 되면 거의 ‘정신적 스승’이다.
“서로 다른 생각이 용납되고 견제와 균형을 이룰 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MBC ‘PD수첩 사태’에 대해 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 지당한 말씀은 대통령의 자성적 독백이어야 한다는 것을 청와대 빼고 다 안다. 대통령과 다른 생각, 특히 ‘비판적 언론’이 하는 생각을 용납하기는커녕 상대도 하지 말라던 일이 한참 전 과거사라면 또 모른다. 오죽하면 젊은 누리꾼들조차 “사돈 남 말 한다”고 했을까.
대통령의 ‘사돈 남 말’ 화법이 왜 자꾸 나오는지 따져 보면 생각의 폭도 넓어질 수 있다. 어제도 “균형발전 없이는 지속 가능한 발전도, 국민의 삶의 질 향상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역시 옳은 말씀이다. 그러면서 왜 대통령자문위원회만 집중 발전시켜 민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해치는지 따로 묻고 싶어진다.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 말대로 “도덕적 하자, 도덕적 결함, 부패 비리, 여기에서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얻고 지금 가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가.
참여정부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참여자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 같다. 도덕이란 건 인류 보편적이고 세계 공통의 법칙이어야 마땅할 것 같지만, 실은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듯 적용됐다 말았다 하는 감정이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 말이 안 되는데 혼자만 옳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자기기만(欺瞞)도 그래서 생긴다. 도덕적 정당성은 진보적 정권 유지의 핵심이기도 하다.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집단일수록 자기 이익과 관련되는 일에서만은 예외를 주장한다는 건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런 걸 한마디로 ‘위선’이라고 한다. 특히 매사에 도덕성과 공동선을 강조하는 좌파에서 두드러진다. 우파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인정하는 편이어서 무조건 도덕성만 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개인들의 자발적 협조가 공동 부(富)를 만드는 과정이 시장경제 아니던가.
좌파에 관해 우리보다 축적된 경험을 지닌 미국에선 그들의 위선에 대한 연구도 상당하다. ‘진보주의자의 위선에 관한 프로필’이란 부제가 붙은 피터 슈와이처의 최근 저서 ‘내가 말하는 대로 하세요(하는 대로 따라하지 말고)’를 보면 세계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놈 촘스키의 위선이 낱낱이 드러난다.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부는 결코 재분배하지 않는 좌파의 거두(巨頭)라는 거다. 그는 세금을 피하려고 전문변호사의 도움으로 딸의 이름을 딴 200만 달러 기금의 ‘다이앤 촘스키 트러스트’를 만들고는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돈을 맡겼기로서니 그게 사과할 일이냐”고 했다.
세상이 다 그렇다면 심지어 무주택자인 우리 대통령이 사돈 남 말 좀 했기로서니 비판할 것도 없지 싶다. 문제는 도덕적 좌파의 굳은 신념이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세상에 고통을 준다는 사실이다. 실패로 판명된 공산주의 혁명까지 갈 것도 없다. 관대한 복지와 노동자 보호, 가파른 누진세와 환경 규제 등 좌파가 주장하는 모든 이상적 시스템을 갖춘 유럽이 내리막 경제로 빠진 게 단적인 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선 유럽 같은 복지제도가 없었으므로 갈 데까지 가봐야 한다는 주장이 판을 치니 국민만 많이 아플 판이다.
노 대통령의 ‘사돈 남 말’에는 2005년 지배세력이 추구하는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자신의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기의 체질화나, 어떤 도덕적 문제에서도 자기편은 제외하는 이중 기준만이 아니다. 그때그때 다른 시대정신의 최근 키워드는 ‘균형’으로 나타난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사회 양극화 해소도 결국 하향 평준화를 통한 균형이 안 되기만 바랄 뿐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