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연말 모임인데도 좌중에 오르내리는 이름이 올해는 작년과 많이 다르다. ‘현직(現職)’ 3년차의 송년회가 ‘차기(次期) 궁금증’으로 넘쳐 난다.
꽤 알려진 어느 386(현재 486)은 “사다지(四多肢) 선택”이라며 4인을 거명한다. 여론조사에서 열거되는 인물 중에 여당 모 씨와 야당 모 씨는 가망이 없다고 장담한다. 묻혀 있는 신인이 튀어나와 별을 딸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한다.
산중(山中)과 속세를 넘나드는 어느 ‘도사’의 점괘는 상식을 깬다. “헛다리들 짚지 말라고 해. 지금까지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들 다 아니여.” 자기 눈에는 아직 떠오르지 않은 셋이 어른거리지만 천기(天機)라서 누설 못한단다.
맞거나 틀리거나 재미로 치면 ‘차기 도박’도 빼놓을 수 없는 국민 오락이다. 하지만 나라 처지가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2년 전 12월 8일자 타임지는 ‘면목 없는 노 대통령’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현물(노무현 후보)을 잘 따져보지 않고 충동구매한 것인지 모른다.’ 이 대목을 ‘유권자의 충동구매죄’라는 칼럼에 인용한 나는 친노(親盧) 인터넷 매체의 공격을 받았다. ‘우리 국민을 낮춰 보는 외신에 대해 반박해야 할 언론인이 외신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나라 망신시키니 속 시원한가.’
지난달 하순 한 여론조사기관이 비공개로 조사했다는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국민 지지율은 18%다. 대통령 지지도가 임기 3년차에 20% 아래로 무너진 것은 기록적이다.
노 후보는 득표율 49%로 당선됐다. 대통령 취임 직후엔 여론조사 응답자의 84%가 ‘노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임기 반환점을 돌 무렵인 올해 8월 지지도가 29%로 조사됐을 때 노 대통령은 TV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을 객체화시켜 말했다. “29%짜리 대통령과 함께 미래를 걱정해야 되는지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18%라니…. 대통령이 안다면 정상적으로는 마음 편할 리 없다. 그러나 더 암담한 쪽은 ‘내 발등 내가 찍었다’고 자인(自認)해야 하는 유권자다.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과 절망과 분노가 지지 철회의 이유 속에 겹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교포 등 700명이 ‘대한민국 살리기 범애국동포 시국선언대회’를 열고 선언문을 채택했다. “헌법을 준수하는 우리는 현직 대통령에게 물러나라는 요구는 하지 않지만 대통령 직 수행에 자신감도, 능력도 상실한 현직이 스스로 임기를 앞당겨 용퇴한다면 막지도 않을 것이다.”
교포 선언문에도 전제됐듯이 대통령은 헌법 절차에 따라 뽑혔다. 결국 국민이 대통령을 만든다. 유권자에게 선택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느덧 차기를 설왕설래하는 상황이 됐으니 3년 전의 ‘모험적 베팅’에서 교훈을 얻고, 현직과 함께한 세월의 학습효과를 망각하지 말 일이다. 말솜씨와 연기력(演技力)이 ‘나라 살리는 대통령’의 상위 덕목이 아님도 체험했다.
노 후보는 감성마케팅에 능했고, 상대 후보는 사이버전(戰)에서 졌다. 차기 잠룡(潛龍)들이 이미지전(戰)과 누리꾼 호객에 부산한 것도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그런 것에 ‘필(feel)이 꽂혀’ 차기를 충동구매하면 또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막말로 ‘누가 된들’이라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최근 2, 3년의 경험만으로도 정권이 국운(國運)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실감했을 우리 국민이다. 최선의 인물이 안 보이면 차선을, 차선도 없다면 차차선이라도 찾아야 한다. 최악보다는 덜 나쁜 정치를 할 터이고 조금이라도 국민에게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더는 친노 반노(反盧)가 잣대일 수 없다. 그간의 친노도, 반노도, 친여(親與)도, 친야(親野)도 원점으로 돌아가 가장 생산적인 차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자면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는 역습 한마디에 주변부 사상 검증을 포기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누구나 흠결과 약점이 있겠지만 대통령에게 진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달아 봐야 한다.
차기도 실패한 선택이 되고 말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정말 기약할 수 없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