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정체를 알 수 없게 되는 이상한 정부 밑에서 한 괴상한 방송 프로그램으로 국민의 긍지와 국가의 위신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꼴을 봐야 하는 심정은 분하고 비통하다. 본분을 벗어난 언론과 정부가 무슨 짓을 더 저지를지 앞날이 불안하기만 하다.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제자리에 돌아와 자기의 본분을 자성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언론과 정부는 다같이 사람을 키우고 또 키워야 한다. 어느 나라나 정부는 각종 교육 자원을 동원해 대량의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언론은 그러한 ‘인재’를 다시 한 ‘인물’로 키워 준다. 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던 사람이 신문에 보도되고 TV 화면에 나오면 갑자기 별난 인물로 돋보이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그걸 언론의 ‘사회적 지위 부여의 기능’이라고 한다.
물론 모든 언론, 모든 정부가 다 인재를 육성하고 인물을 키워 주는 것은 아니다. 인재 양성에 사보타주(태업)하는, 아니 역행하는 정부도 있다(우리에게 그런 정부가 낯설다고 할 수 있을까). 인물을 키우는 데 인색한 언론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물을 내놓고 “죽이겠다”고 덤비는 언론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에 구경했다. 그것도 ‘영웅 없는 시대’에 드디어 나타난 국민적 영웅이자 국가 위신을 크게 드높여 준 한 인물을!
인물을 키운다는 것은 그 인물의 권위를 높여 준다는 것이다. 그가 이룬 업적의 권위를, 그를 평가하는 기준과 규범의 권위를 높여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언론의 ‘사회적 규범 강화의 기능’이다. 신문·방송은 일상적인 삶의 주변에서 미담의 주인공을 찾아내고 범죄자를 밝혀 줌으로써 바로 선과 악의 사회적 윤리규범의 권위에 힘을 실어 준다.
권위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됨으로써 비로소 권위는 자리를 굳혀 간다. 사회적 규범의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인물의 권위도 그렇다. 누구나 다 지닌 온갖 인간적 약점, 인간관계의 갈등 등을 이겨 내며 제 분야에서 남다른 각고의 진력 끝에 한 사람의 지도자, 학자, 예술가의 권위는 생겨난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그들에겐 아직 결점, 약점이 있을 수 있다. 나쁜 비평가가 그런 약점만을 쑤시고 다닐 때 훌륭한 비평가는 “칭찬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깨우쳐 준 한 유럽 언론인의 말을 나는 내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많은 시간과 노력 끝에 생겨난다는 점에서 ‘권위’는 그의 가깝고도 먼 이웃인 ‘권력’과 구별된다. 우리가 익히 경험한 것처럼 권력은 총칼의 무력에 의해서 또는 대중선동의 데마고그(선동정치가)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얻을 수도 있다. 여기서 권위와는 다른 권력에 대한 언론의 역할이 요청된다. 권위는 지켜 주되 권력은 ‘감시’해야 하는 역할이 언론의 또 다른 본분이다.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지 않고 권력을 지켜 주는 시녀 노릇을 한다? 그것은 전체주의 독재체제하의 언론일 뿐 다원주의 민주사회에선 언론의 본분 망각이요, 타락이다.
권력을 감시 않고 권위를 무시하는 언론, 권력과 ‘코드를 맞추며’ 국가 위신이 걸린 인물을 ‘죽이려’ 하는 언론. 참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될 해괴한 언론의 ‘부조리 드라마’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도대체 세계 최첨단의 전문 과학 업적을 비전문의 방송 PD가 검증하겠다고 덤비고, 그걸 정부는 방관 내지 후원하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100년의 과거사를 정부가 임명한 비전문의 위원들에게 “밝혀 보라”고 위촉하는 나라가 아니고서는…. 과학기술 행정의 총책을 맡은 장관이 비록 뒷북을 친 꼴이 되었지만 과학의 검증은 과학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뜻의 말을 했다(6일 밤 YTN TV대담).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사의 검증은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바른말을 할 장관은 나오지 않는가.
황우석 교수의 ‘수난극’을 보면서 ‘난중일기’를 읽고 비분의 눈물을 흘린 생각이 자꾸 난다.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영웅 충무공을 역모로 몰아 죽이려 했던 나라가 이 나라다. 그러고도 정유재란이 나자 백의종군하여 명량대첩이란 불후의 전공을 세운 이 충무공. 황 교수가 ‘난중일기’를 보면 다소라도 마음의 위안이 될까.
최정호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