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 대회의 홍보를 맡은 K-1걸들이 피트니스센터 ‘더블H 짐’에 있는 링에 올랐다. 이들은 눈요깃감이 아니라 프로 모델로 기억되고 싶다고 한다. 왼쪽부터 정윤희 최희정 조유 이현진.(의상 협찬 클럽54) 변영욱 기자
《킥복싱 가라테 쿵푸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알파벳 K.
그 중 최고를 가리자는 뜻에서 나온 이종격투기 대회가 ‘K-1’이다.
K-1은 ‘최배달’로 유명한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가라테의 유파인 정도회관(正道會館)의 이시이 가즈요시(石井和義)가 창시한 입식 격투기.
‘프라이드 FC’처럼 메치기 조르기 누르기 관절꺾기 등 누워서 격투를 벌이는 그래플링과 구분된다.
K-1은 민속씨름 출신인 최홍만의 출전으로 한국에서도 인기 상승 중이다. 지난달 서울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선수 못지 않게 주목받는 여성들이 있다.
바로 ‘K-1걸’들. 이들은 “땀 냄새 물씬한 사내들의 싸움터에서 싸움 잘하고 미인을 얻고 싶은 남성들의 ‘마초 로망’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이학수 K-1 미디어팀장)는 평을 듣는다.
정윤희(25) 이현진(23) 최희정(24) 조유(23) 등 네 명의 K-1걸을 만났다.》
○ 눈요깃감이라고요?
정윤희: 그런 면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 음흉한 눈으로 아래위를 훑는 관객들도 있다. 어느 정도 섹시 코드를 활용하지만 우리는 프로다. 많은 경험과 훈련을 거쳐서 이 자리까지 왔다.
이현진: 우리는 ‘레이싱 모델’(걸보단 모델로 불러 달라)을 포함한 홍보 모델 경력이 3∼4년에 이른다. 요즘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부정적인 이들을 만나면 속상하다. 한 명씩 붙잡고 설명할 수도 없고….
최희정: 이후 연예계로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을 ‘징검다리’로 생각하진 않는다(모두 “맞다”며 박수). 레이싱 모델도 차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무대에 오를 기회조차 없다. 포즈 연구 및 연습도 계속해야 하고. 안주했다간 금방 도태된다.
조 유: 홍보 모델은 자신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호감을 극대화하는 게 목적이다. K-1걸들은 K-1 무대를, 링 위의 파이터들을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의 마초 로망을 자극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 예뻐 보인다면 기분이 좋긴 하다. 다만 일에 최선을 다해 더 예뻐 보이는 것이었으면 싶다. 인기가 높아지면 야한 화보를 찍는 일부 모델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진 마라.
○ 스토커도 있어요
조: 화려해 보이지만 관두고 싶을 만큼 힘들기도 하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끊임없이 연락하는 스토커도 있었다. 경찰에 의뢰해 해결했지만 한밤중에 전화해 ‘만나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할 땐 소름끼쳤다.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정: 아버지가 보수적이라 한동안 공개하지 못했다. 알려진 뒤에는 얼마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는지. 주위에서 “딸이 이상한 일을 한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가 힘들어하시는 것을 봤을 땐 참기 어려웠다.
최: 처음에는 고생도 엄청 했다.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도 있어 많이 울었다.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관두는 동료나 후배도 많다.
이: 누리꾼들이 가장 무섭다. 팬도 많지만 안티도 얼마나 많은지. 탤런트 이서진이 TV에 나와 여자친구 이름을 말했는데 나와 동명이인이었다. 그 때문에 미니홈피에 난리가 나고, 악성 메일도 엄청 받았다.
정: 다니기도 조심스럽다. 길거리에서 촬영 각도를 희한하게 잡아서 이상하게 나온 사진만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 우리는 프로입니다
최: 좋은 점도 많다. 일정 단계에 오르면 일반 직장인보다 많이 벌기도 하고. 애정 어린 충고를 몇 년째 보내 주는 팬도 있고 아들 때문에 가족 모두가 팬이 됐다며 찾아오는 분도 있다.
정: 한번은 취객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는데 남성 팬이 막아주더라.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관객과 개인적으로 만나진 않지만 한번 만나 봐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을 보호해 줄 줄 아는 남자라면 당연히 인간적으로도 끌린다.
이: 자기 일에 열심인 프로로 기억되고 싶다. 미래의 남자 친구가 내 일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겉모습만을 보여 줄 수밖에 없는 직업이지만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커리어 우먼으로 인정받고 싶다.
조: 모델은 평생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패션 공부를 할 것이다. 모델로 성공하는 게 현재의 목표라면, 다음의 꿈은 내가 만든 옷을 내 아이에게 입힐 수 있는 디자이너다.
정: 일본에서는 홍보 모델도 당당한 직업으로 대접받고 있다. 한국도 많이 나아지고 있다. 후배들은 어느 자리에서도 ‘레이싱 모델’ ‘K-1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기 바란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