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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입력 | 2005-12-10 02:55:00

그림 박순철


만약 한신이 뜻한 바를 다 이루었다고 할 만큼 입신(立身)한 뒤였다면 회음(淮陰)의 저잣거리를 여유롭게 추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뒷날 초왕(楚王)이 된 한신은 회음을 찾아보고 그곳을 떠도는 남루한 기억과 욕스러운 이력들을 너그럽게 감싸 휘황한 추억과 전설로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무섭이 찾아갔을 때만 해도 한신에게 회음은 아직 들추고 싶지 않은 상처와 회한이 더 많은 땅이었다. 마음 졸여가며 겨우 제나라 왕이 되기는 했지만, 어려웠던 지난날을 그리움으로 돌아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회음시절을 아는 무섭도 반드시 반갑지만은 않았다.

“위로는 천문(天文), 아래로는 지리(地理)라고 하셨던가요? 머리 가득 차 있는 것이.”

한신이 얼른 대답이 없자 무섭이 무언가를 일깨우듯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한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가슴에는 큰 뜻이 가득하다고도 했소. 뱃속은 늘 비어 있지만.”

“앉아서 천 리, 서면 만 리를 바라볼 수 있다 하셨지요. 아마. 앉으면 무릎 사이가 사해(四海), 서면 어깨에 구름이라고도.”

“그렇다면 우리가 만난 곳이 주부(朱負·주씨 성 쓰는 아낙)네 술집이었겠구려. 그때 그 주씨(朱氏) 아주머니 참으로 무던한 사람이었지. 술빚을 많이 졌는데 과인이 다 갚지 못하고 회음을 떠났소.”

한신이 비로소 감회에 찬 얼굴이 되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집 술 외상을 다 갚지 못하고 떠났지요.”

무섭도 껄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한신은 여전히 무섭이 찾아온 게 반가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젊은 날에 친 허풍을 잘 기억하는 만큼 그때의 상처와 약점도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벌써 스무 해가 다 돼 가는가.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짓도 많이 했을 것이오.”

한신은 그렇게 앞질러 무섭의 입을 막아놓고 말 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옛 사람을 만나니 옛일이 새롭구려. 그래, 이번 사행(使行)길에는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오셨소?”

그러자 무섭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악인도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막는 법입니다. 그런데 한때나마 흉금을 터놓고 지낸 이가 어렵게 높은 자리에 오르고도 죽고 망할 길을 걷고 있는데 어찌 그냥 보아 넘길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오? 누가 죽고 망할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오?”

한신이 무섭의 말뜻을 짐작은 하면서도 짐짓 못 알아듣겠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무섭이 갑자기 근엄한 목소리가 되어 받았다.

“바로 제왕 그대(足下·족하)외다. 그대는 한왕을 주군(主君)으로 골라 죽을 길로 접어들었고, 이제는 제나라 왕에 올랐으면서도 패망할 길만 고집하고 있소.”

상국(上國)이랄 수 있는 서초(西楚)의 패왕이 보낸 사자다운 위엄까지 배인 말투였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