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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의 필독서 50권]시간의 여울

입력 | 2005-12-13 03:03:00


이 책은 수필집이 가진 친근한 글맛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예술로 커진 인간의 정신과 감각을 잘 보여 준다. 탁월한 예술 작품이 흔히 그러하듯 미처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삶의 세계가 눈앞에서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우선 쉽다. 예술이 무엇인지, 난삽한 이론이나 지루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어린 시절 추억부터 화가로서의 생활, 미식가로서 먹는 일에 대한 애착, 그리고 현대 예술의 사상까지 지은이는 자기 삶을 차분하게, 그러면서 유머러스하게 꺼내 놓는다.

이 책에서 인상적으로 이어지는 간명한 문장들은 사실 감각적 개방성과 정신의 집중이 높은 긴장을 유지하는 데서 나왔음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개방성과 집중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다는 말은 모순어법이지만 이들 사이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 좀 더 큰 시각이 열리는 것임을 이 책은 거듭 거듭 보여 준다.

세계를 향해 환히 열려 있는 지은이의 감각은 음악을 듣거나 음식을 먹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간에 감동과 도취로 치우치는 법이 없다. 열려 있는 예술가의 감각과, 죽음을 불사하는 신념에의 도취는 상극이다. 신념은 외골수의 삶이고, 그런 삶은 다른 삶을 억압하고 소통을 거부한다.

일본에 사는 지은이가 한국의 문화인 친구들 중에서 신념으로만 뭉친 답답한 사람을 발견하면서도 한국의 밥상에서 자유와 해방을 발견하는 것은 썩 보기 좋은 균형을 이룬다. ‘한국 음식은 일품요리의 완성된 독립이라는 서양 음식의 발상과 다르다. 온갖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만 먹는 자가 제멋대로 골라 먹는 그 음식들이 입속에서 만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진짜 요리가 된다.’ 지은이의 이런 견해는 한국 문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자유와 해방감에 관한 비범한 관찰이다. 한국 사람들이 입어 온 흰옷이 낮의 색깔이자 유교적이라면 현란한 원색은 밤의 색깔이자 무교, 도교적이라는 견해 또한 한국 문화의 웅숭깊은 우물을 그윽이 들여다보는 양면성의 시각을 견지한다. 지은이는 한국 문화가 가진 야성의 원시적 힘에 경탄하면서도 또한 조야한 폭력성을 자주 지적한다.

조각은 눈뜬 공간이라는 지은이의 도발적인 정의는 추상적이다. 하지만 생활에서 경험한 일을 적은 ‘아크로폴리스와 돌멩이’라는 글을 통해 열림과 닫힘의 관점으로 이해된다. 이런 내용이다. 그리스 여행지에서 선물 받은 돌멩이들을 우편으로 집으로 부친 뒤 여행에서 돌아와 방안에 놓인 돌멩이들을 쳐다보면서 온갖 신화적 상상을 편다. 그러나 그 돌멩이들이 사실은 부인이 집 앞의 길가에서 주워 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집 주위에 깔린 돌멩이들의 존재와 그 돌멩이들이 놓인 한없이 열린 공간을 재인식하게 된다. 열려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고의 맹목을 잘 포착한 걸작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한다.

글들이 대부분 짧고, 문장은 간결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깊고도 통렬하다. 사태의 핵심으로 육박하는 지은이의 통찰력을 극도로 절제되고 능란한 문장이 실어 나르고 있다. 이 때문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의 생동감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화가이자 조각가가 글쓰기에서도 고도의 품격에 도달한 희귀한 예가 아닐 수 없다.

이영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한국문학 강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