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미국 삼촌. 사진 제공 백두대간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세요….’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할리우드 영화와는 색깔이 사뭇 다른 프랑스 영화가 23일 나란히 선보인다. 서울 광화문의 씨네큐브에서 개봉되는 ‘내 미국 삼촌’과 서울 종로2가 필름 포럼에서 상영되는 ‘갇힌 여인’이 그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1959년)을 만든 거장 감독 알랭 레네(83)의 ‘내 미국 삼촌’은 행동과학자 앙리 라보리 교수의 인간행동과 심리에 관한 책이 원작이다. 유럽에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감독 샹탈 아커만(55)은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손꼽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제5권 ‘갇힌 여인’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두 작품은 인간의 내면 풍경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내 미국 삼촌’은 인간의 뇌와 기억, 행동의 상관관계를 꼼꼼하게 탐색하며, ‘갇힌 여인’은 사랑과 욕망의 파괴적인 본성을 파헤친다. 소재는 다르지만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 효과에 기대지 않고 영화가 얼마나 다양한 표현 방법을 갖고 있는지를 일깨워 주는 작품이란 점에서 닮았다.
갇힌 여인. 사진 제공 이모션픽처스
줄거리를 좇기보다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가는지, 영상의 감각적 전개와 창의적 연출을 살펴보는 게 관람 포인트. 하나 덧붙이자면, 프랑스 여배우들의 독특한 미모와 섬세한 표정도 ‘바비 인형’ 같은 할리우드 여배우들과는 또 다른 매혹으로 다가온다.
딴생각하며 대충 보다간 영화의 맥을 놓치기 쉽다. 단선적 스토리가 아니라 이야기가 중첩되거나 모호하기 때문이다. “요즘 영화 다 그게 그거지”라고 투덜거린 관객들이라면, 왕년에 프랑스문화원을 들락거리며 영화를 즐겼던 중년 세대라면 도전해 볼 만하다.
○ 내 미국 삼촌
미국에서 온 삼촌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제목은 오래전에 미국에 이민 간 친척이 갑자기 돌아와 생각지도 않던 큰 유산을 물려 준다는, 유럽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따온 것. 비루한 현실을 사는 인간에게 행복은 어쩌다 오는 횡재일 뿐, 아무리 기다려 봤자 그런 삼촌이 나타날 리 없다. ‘내 미국 삼촌’이란 결국 헛된 기다림의 대상을 상징한다.
영화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쟝, 그의 정부인 연극배우 자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의류회사 공장장으로 출세한 르네 등 세 인물의 삶과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인간 행동의 전형성을 보여 주는 캐릭터로 선택된 만큼 이들의 인생 역정은 인간에 대한 냉철한 이해를 돕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라보리 교수가 영화에 등장해 해설을 하고 주인공들의 행동양식은 실험실 흰쥐와 직접 대비되며 흑백영화 화면이 삽입되는 등 영화의 실험적 스타일은 교양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과학과 영상의 만남은 놀랍도록 정교해 인간행동의 원리를 깨우쳐 준다. ‘유아기의 경험이 남은 생애를 결정한다’ ‘모든 갈등에는 영역 다툼이란 근본 원인이 숨겨져 있다’ ‘시련을 만나면 때론 도피하는 것도 삶의 유용한 방법이다’ 등.
생각하며 보는 영화다. ‘철학적 퍼즐’이란 평을 들을 만큼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겹쳐져 있으나 반짝이는 유머와 위트도 숨겨져 있다. 원제 ‘Mon oncle d'Am´erique’.(1980년) 15세 이상.
○ 갇힌 여인
한 남자가 여자의 뒤를 쫓는다. 여자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 호텔로 들어간다. 남자는 호텔 안까지 몰래 따라간다.
첫 장면부터 서스펜스가 묻어난다. 알고 보니 남녀는 같은 집에 사는 연인 사이. 부유한 집안의 작가 지망생인 시몬이 애인 아리안을 미행한 것이다. 시몬은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무의식까지 지배하려 한다.
“난 당신이 무얼 생각하는지, 당신이 누구인지, 무얼 숨기고 싶은지 알고 싶어.”
시몬의 대사에선 강박적인 사랑과 불온한 집착이 읽힌다. 여자에겐 남자가 닫혀 있어서 매력을 느끼지만 남자는 여자의 모든 걸 알아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우긴다. 그래서 여자를 너무 사랑하면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질투한다.
배우들의 설득력 있는 연기, 화면의 아름다운 구도와 장중한 클래식 음악의 선율이 어우러져 있다. ‘사랑’과 ‘소유욕’에 대한 우아하고 도발적인 심리 보고서란 평이다.
느끼면서 보는 영화다. 원제 ‘La Captive’.(2000년) 18세 이상.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