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오달수 씨가 들려준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
“1997년 ‘남자 충동’이라는 작품을 준비할 때였다. 당시 배우들끼리 모여 앉은 뒤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오로지 눈빛만으로 동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아맞히게 하는 훈련을 했다. 의외로 10명이면 7명의 눈빛을 다 맞혔다. 그런데 그 눈빛이 ‘슬프다’ ‘기쁘다’ 같이 쉬운 표현만 아니라, 예를 들면 ‘애국가’ ‘밥’처럼 황당한 눈빛들도 다 맞히더라.”
많은 배우가 꼽는 중요한 신체 표현 수단은 ‘눈’. “사람의 생각은 눈에서 나오기 때문”(연출가 박근형)이다. ‘눈빛 연기가 좋다’ ‘눈빛이 살아 있다’는 말을 배우들이 큰 칭찬으로 여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유인촌 조재현 최광일 그리고 젊은 배우 김영민 등이 연출가들이 흔히 ‘눈빛이 좋다’고 꼽는 배우들이다.
배우의 눈빛 연기를 가장 잘 맛볼 수 있는 소극장에서는 무대 위 배우와 관객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대부분의 관객은 민망해 하며 먼저 눈을 돌리지만, 간혹 배우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눈싸움’을 걸어오는 당돌한(?) 관객도 있다.
“관객이 눈싸움을 걸어올 때 배우가 절대 시선을 먼저 떼서는 안 된다. 배우와 관객의 기(氣) 싸움인 만큼 배우가 시선을 먼저 돌리면 그날 공연은 망치는 거다.”(오달수)
연극배우들이 ‘눈싸움’에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눈싸움’을 잘한다고 꼭 ‘강렬한 눈빛’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연출가는 “요즘은 그저 눈에 힘만 잔뜩 주면 ‘눈빛 연기’를 한다고들 하더라” “옛날 배우들은 눈빛이 살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배우를 보기 힘들다”고 한탄한다.
중견 배우 윤주상 씨도 “요즘 젊은 친구들은 상대방을 그냥 쳐다만 볼 뿐 제대로 바라볼 줄은 모르는 것 같다”며 “연기는 시선과 서로 얽히면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많은 경우 눈에 표정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눈빛은 거울 보며 눈에 힘주는 연습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과 많은 경험 속에서 얻어진 생각과 깨달음이 눈을 통해 자연히 배어 나오는 것이다. 나이가 젊어도 삶(연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상처를 가진 배우의 눈빛은 확실히 깊다. 요즘 젊은 배우 중 눈빛 좋은 배우가 없다는 말은 어쩌면 연극에 대한 치열함이 전보다 부족하다는 것이 아닐까.”(연출가 심재찬)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