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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보다 소중한 자존심 되찾았죠”

입력 | 2005-12-21 03:02:00

19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대성당 프란시스홀에서 열린 노숙인 대상 인문학 강좌 종강식에서 한 노숙인 수강생이 동료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재명 기자


예술 과목을 담당하는 김종길(37·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강사가 교실로 들어섰다.

학생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목례를 나눈 김 강사는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 선생님.” “예.”

학생들에 대한 깍듯한 존칭으로 수업은 시작됐다.

“오늘은 1학기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아무런 준비물도 필요 없습니다. 하얀 종이에 자신의 생각과 꿈을 표현하세요.”

한 노숙인 수강생이 그린 작품. 작은 배 한 척이 수평선 멀리 돛단배 위에 걸려 있는 ‘희망을 위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김재명 기자

모두가 도화지에 고개를 푹 숙이고 골몰했다. 옆 사람의 그림을 흘깃흘깃 훔쳐보는 모습은 영락없이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이었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대성당 프란시스홀에서 열린 마지막 수업은 학생들에겐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노숙인 지원기관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와 삼성코닝이 공동으로 마련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사회의 ‘낙오자’였다.

노숙인을 위해 인문학 과정이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1명의 수강생으로 9월 시작된 강의는 17명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함께했다. 40여 분이 지나 자신의 그림을 발표하는 시간이 됐다.

달팽이 등과 비슷한 모양을 그리고 세 부분으로 나눠 빨강 파랑 노랑으로 색칠한 윤모(48) 씨가 발표자로 나섰다.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빨간색 부분입니다. 빙글빙글 돌아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파란색 부분으로 들어섰죠. 저는 이제 노란색 부분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 있는 거죠.”

박수갈채 속에서 한 동료가 농담을 건넸다. “내가 볼 땐 골뱅이 안주 같은데….”

윤 씨가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이제 절대 술 안 마십니다.” 3년 전부터 서울역 등에서 노숙생활을 한 윤 씨는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 살아왔다고 말했다.

1학기 강의는 철학과 예술, 작문으로 꾸며졌다. 수강생들은 일주일에 3번 강의를 듣고 나머지 시간은 동사무소에서 공공근로를 했다. 동사무소에선 수업시간도 공공근로시간으로 인정해 줘 매달 38만 원씩을 수당으로 지급했다.

4년간 노숙생활을 한 이모(57) 씨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오라는 작문 숙제를 하기 위해 밤을 새운 적이 있다”며 “내가 무엇인가에 몰두해 다시 밤을 지새울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임영인(林永寅·46) 신부는 “많은 사람이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먹을거리 잠자리 일자리를 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노숙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시서기 지원센터는 내년 1월 인문학 과정 2학기를 시작한다. 이어 1, 2학기 수료자를 대상으로 5월부터 1년 과정으로 취업과 창업을 위한 자활교육을 시작할 예정이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복지 늘리면 노숙인 더 는다?▼

노숙인이 계속 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노숙인이 가장 많이 몰리는 서울역에선 19일 밤 199명이 역사 안 곳곳에서 칼잠을 잤다. 이날 공식 집계된 서울시 전체 노숙인은 472명. 전국 노숙인은 7월 현재 1276명으로 처음 1000명을 넘었다. 이는 2000년(548명)에 비해 배 이상으로 늘어난 수치다.

서울시는 올해 3월부터 한 달간 공공근로사업을 알선한 뒤 정식 주거지를 마련하면 계속 일자리를 주는 방식의 노숙인 자활지원사업을 벌였다. 현재까지 참가자는 4300여 명. 하지만 이 사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자립 비용을 마련하고 있는 노숙인은 60여 명이다. 한 노숙인 쉼터 관계자는 “하루 일당(2만 원)이 일반 공공근로사업(하루 2만5000∼2만7000원)보다 적어 자립 비용을 마련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3월부터 노숙인을 임시 숙소인 ‘드롭인 센터’로 안내하기 위해 ‘드롭인 센터 이용 유도반’을 운영했으나 시민단체 등의 참여가 저조해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서울시는 올해 40억 원을 들여 드롭인 센터 정원을 180명에서 670명으로 크게 늘렸지만 실제 거주 인원은 19일 현재 457명에 그치고 있다.

동덕여대 남기철(南基澈·사회복지학) 교수는 “올해 노숙인 업무가 중앙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이양된 뒤 ‘노숙인 복지대책을 늘리면 노숙인이 몰린다’는 인식 때문인지 노숙인 복지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