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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풀어본 2005년 정치권]술잔에 휘청…단식에 어질

입력 | 2005-12-23 03:04:00


《정치권이 시끌벅적했던 한 해였다. 여야가 극심하게 대립했던 주요 이슈나 정책 싸움 외에도 국회 안팎에서는 각종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술판과 단식, 욕설과 소신 발언이 엉키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벌인 각종 해프닝과 에피소드, 쏟아놓은 말들은 때로 국민의 칭찬을 받기도, 입맛을 쓰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보이는 국회의 모습은 한국 정치의 현 수준을 읽을 수 있는 냉정한 지표이자 정치문화의 변화를 보여 주는 편린이기도 하다. 다사다난했던 2005년 국회의 모습을 키워드로 풀어본다.》

◆술…잇단 음주 추태… “싸가지없는×” 폭언도

술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의원이 여느 해보다 많았다. 한나라당 곽성문(郭成文) 의원의 맥주병 투척, 주성영(朱盛英) 의원이 낀 대구 술자리에서의 성 폭언, 박계동(朴啓東) 의원이 이재정(李在禎)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게 맥주를 끼얹는 사건 등이 잇따랐다.

일부 사건은 양측의 진실게임과 맞고소 등의 송사(訟事)로 이어지며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국정감사 기간에 벌어진 주성영 의원 관련 사건은 국회의원들이 피감기관과의 술자리를 기피하게 하는 의외의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주승용(朱昇鎔) 의원은 이름이 비슷해 주변 사람들에게 괜한 곤욕을 치렀고, 주성영 의원 자신도 사건 직후 10·26 국회의원 재선거 유세를 숨죽인 채 음지에서 도와야 했다.

최근에는 같은 당 이규택(李揆澤) 최고위원이 점거농성 중인 국회의장실에서 소주를 마신 일로 빈축을 샀다. “국회의장실에 음식을 반입하지 말라”는 의장실 측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격려차 과메기와 회 등을 들여보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비슷한 시기 국회의장실 여비서에 대한 임인배(林仁培) 의원의 ‘싸가지 없는 ×’ 발언도 격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올해 술과 관련된 추태는 모두 한나라당에서 터졌다. 그때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역시 많이 먹고, 많이 마시는 돈 많은 정당”이라는 비아냥이, 한나라당에서는 “미꾸라지 몇 마리가 연못(한나라당) 물을 다 흐린다”는 탄식이 쏟아졌다.

정치권의 비뚤어진 술 문화를 바로잡아 보자는 ‘폭소클럽(폭탄주 소탕 클럽)’ 시도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회원들이 “폭탄주가 아닌 칵테일”이라고 애써 위안하며 하나 둘씩 폭탄주에 손을 대 결국 ‘폭탄주 소비 모임’으로 변질됐다. 이계진(李季振) 대변인도 최근 폭소클럽 회장인 박진(朴振) 의원에게 “죄송하다”며 폭탄주 5잔을 마신 일을 ‘고해성사’했다.

그래도 박 의원은 ‘나홀로 폭소클럽’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 및 현역 중진의원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7차례나 폭탄주를 고사했다”며 자신이 ‘폭소클럽에 남는 최후의 1인’이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밥…행정도시법-쌀 비준안 반대 단식 봇물

2005년 국회는 단식으로 시작해 단식으로 끝났다.

3월 2일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의 거센 반발 속에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다음 날 전재희(全在姬·경기 광명을) 의원이 단식에 돌입했다. 3월 15일 전 의원은 체내에 전해질이 부족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13일간의 단식을 마감하고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몸무게는 10kg이 빠졌다.

일주일간 병원에서 몸을 추슬렀지만 단식의 후유증은 컸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듯 늘어졌고,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가 지속됐다. 단기적 기억력 감퇴 현상도 일어났다. 주말에 수목원 등으로 요양을 가고 한약을 지어 먹기도 했지만 몸은 8월이 돼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전 의원은 “다시는 단식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강기갑(姜基甲) 의원은 쌀 협상 비준동의안의 국회 처리를 반대하며 10월 27일부터 무려 29일간 단식을 했다. 그러잖아도 마른 강 의원은 단식을 마친 뒤 몸무게가 10kg이나 빠져 불과 44kg밖에 안 되었으나 ‘강골’을 과시했다. 단식 21일째 호흡 곤란으로 쓰러져 일시 입원하기도 했지만 강 의원은 단식을 푼 뒤에 홍콩으로 가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농민 시위를 이끌었다.

이 때문에 한때 강 의원이 ‘단식 중 카스텔라를 먹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민노당 측은 “강 의원은 밀가루 음식을 아예 입에 대지도 않는다”고 일축했다. 평소 자신이 직접 재배한 유기농 쌀과 야채만을 먹고, 매일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국회 건강관리실에서 냉온욕을 하는 것이 단식으로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비결이라고 한다.

지난달 24일 헌법재판소의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 위헌 여부 결정을 앞두고 국민중심당(가칭) 정진석(鄭鎭碩·충남 공주-연기) 의원은 10일간, 열린우리당 선병렬(宣炳烈·대전 동) 양승조(梁承晁·충남 천안갑) 의원은 9일간 단식하며 헌재의 합헌 결정을 촉구했다.

평소 100kg의 거구인 정 의원은 8kg이 빠진 단식 마지막 날, 의원실에서 국회 본회의장까지 보좌관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끌다시피 할 정도로 기진맥진했다.

◆말…엉터리 질의자료 배포 창피-해명-사과

올가을 국정감사에서는 의욕이 앞선 의원들의 ‘헛발질’이 나오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홍미영(洪美英) 의원은 10월 6일 충청북도 국감에서 ‘이원종(李元鐘) 충북지사가 안기부 도청 X파일과 관련해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질의자료를 배포했다. 이는 이 지사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때의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비서관과 혼동한 것.

같은 당 이경숙(李景淑) 의원은 10월 4일 한국방송공사(KBS) 국감에서 ‘동아일보가 보도한 KBS의 수신료 소송과 관련된 기사에 논란이 일자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기사를 내렸다’는 근거 없는 자료를 배포했다. 이 의원 측은 “경험이 부족한 비서관의 실수”라고 해명했다.

한나라당 이종구(李鍾九) 의원은 10월 3일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는 1가구 2주택자’라는 자료를 냈으나 이 총리는 이미 한 채를 팔아버린 뒤였다.

반면 열린우리당 조일현(曺馹鉉·강원 홍천-횡성) 의원은 지난달 2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민주노동당이 쌀 협상 비준동의안 처리를 육탄 저지하는 와중에도 비준안 통과를 지지하는 찬성토론을 벌여 ‘용기 있는 소신발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역구가 농촌인 조 의원은 폭력시위 혐의로 홍콩 경찰에 구속된 한국 농민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러 23일 홍콩으로 떠난다.

◆혼…의원들 결혼-재혼도… “세상 많이 변했네”

혼란의 와중에도 ‘결실’은 있었다.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의원들의 결혼(재혼)이 많았다. 한나라당 김희정(金姬廷·34) 의원이 5월 결혼했고, 열린우리당 선병렬 의원이 9월 4세 연상의 여교사와 재혼했다.

한나라당 안명옥(安明玉) 의원은 공개적으로 언론인인 이혼남과 재혼 계획을 밝혔으며 열린우리당 홍미영 의원도 재혼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싱글인 송영선(宋永仙) 의원은 “안명옥 의원, 결혼 두 번 합니다. 누구는 두 번 가는데, 뭡니까 이게…”라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17대 최연소인 김희정 의원은 “아이를 가지면 배가 잔뜩 부른 몸으로 의정활동을 해서 임신한 여성도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놓겠다”고 말했다.

‘감성정치’도 두드러졌다.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의 미니홈피는 인기 사이트. 반면 한나라당 원희룡(元喜龍) 의원은 4·30 국회의원 재·보선 당일 카트라이더 게임을 하는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박 대표에게서 공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 정두언(鄭斗彦) 의원은 음반을 내고 그룹 ‘클릭비’와 합동 공연을 하기도 했다. 정 의원은 “이후 지역구 어르신들한테서 ‘일하라고 뽑아놨더니 노래나 부르고 다니냐’는 꾸중도 들었다”고 말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