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현 주러시아 대사관 정무참사관(가운데)이 20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로바체스코보 거리에 있는 모스크바국제관계대 카레이스키클럽에서 강연한 뒤 클럽 소속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남북한의 생활수준 차이가 너무 커 가까운 시일 안에 통일을 낙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최근 한국이 러시아에 ‘시장경제국가’ 지위를 인정했는데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요?” 한반도 전문가들이 모인 국제학술회의에서나 오고 갈 법한 얘기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대학 2학년생이, 그것도 유창한 한국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곳이 있다. 20일 러시아 최고의 명문대로 꼽히는 외교부 산하 모스크바국제관계대(MGIMO). 학기말 시험 기간인데도 강의실을 꽉 채운 40여 명의 학생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 학생 20여 명과 한국 유학생 40여 명이 함께 만든 학내 동아리 ‘카레이스키클럽’의 정기 모임 자리다. 카레이스키는 러시아 내 한인(韓人)을 일컫는 말.
이날은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백주현(白宙鉉) 정무참사관을 초청해 ‘역동적 동북아 질서 속의 한-러 관계 발전’이라는 주제 발표를 들었다. 그는 1990년대 한국 외교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옛 소련에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
학생들의 모임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던 백 참사관은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지자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오랜 외교관 경험을 바탕으로 “동서독 통일과 옛 소련 붕괴를 현장에서 지켜봤다”며 “역사적 사건은 때로는 갑작스레 들이닥친다”며 조심스레 답변했다.
이 클럽은 한 학기에 서너 번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 이런 자리를 마련한다. 얼마 전에는 KOTRA 동유럽지역 본부장과 한국관광공사 모스크바 지사장이 다녀갔다. 북한 핵 사태가 불거졌을 때는 주러시아 미국대사관의 고위 외교관을 초청해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방침을 듣기도 했다.
물론 무거운 얘기만 오가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초청 인사들에게서 ‘인생 선배’로서의 경험도 듣는다.
이 대학은 원래 옛 소련 시절 외교관 같은 ‘대외 일꾼’ 양성을 위해 설립됐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에서는 외교관의 인기가 별로다. 그 대신 연봉이 수십 배 많은 외국계 기업과 에너지 관련 기업이 인기가 있다. 한 학생이 “외교관이 되고 싶어 입학했지만 대우 때문에 민간 기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백 참사관은 “나도 20여 년 전 비슷한 고민을 했다”며 외교관으로서의 보람과 고충을 설명한 뒤 “당장의 경제적 손익보다는 인생을 길게 보고 신중하게 진로를 결정하라”고 조언했다.
백 참사관은 외교관 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일로 1983년 9월 러시아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한 당시 소련 전투기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 씨와 희생자 유족의 만남을 주선하고 통역까지 했던 일을 꼽았다. 무려 9시간이나 걸린 자리였다. 백 참사관이 “말은 통역이 가능해도 감정까지는 통역하기 어려웠다”고 당시를 회상하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레이스키클럽은 한국 영화 상영 같은 다양한 행사도 마련한다. 회장인 2학년 알렉산드로 셰브첸코 씨는 “곧 다도(茶道) 특강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학을 전공하는 미래의 한국 전문가들이다. 입학 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거나 관심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
국제관계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니콜라이 슬르코프 씨는 LG전자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러시아판 ‘장학퀴즈’인 ‘움니키 움니차’(똑똑한 학생들)에 입상해 한국을 방문한 후 한국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학과 여학생인 아냐 슈닌코프스카야 씨는 한국과 가까운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으로 자연스레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경우.
이 클럽에서 활동한 졸업생은 대부분 러시아 외교부와 한국 기업에 진출한다. 클럽의 초대 부회장인 일리야 표도토프 씨는 졸업 후 삼성전자의 장학금을 받아 한국에서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밟고 있다. 3년간의 한국 유학이 끝나면 삼성전자에서 일할 예정이다. 그는 “카레이스키클럽 활동이 장학생으로 선정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유학생들에겐 현지 적응을 돕는 클럽이기도 하다. 공동 회장을 맡고 있는 유학생 이로아 씨는 “우리 클럽은 앞으로 양국 관계를 이끌어 갈 미래의 주역들이 어울리는 곳”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 모스크바국제관계大는
사각모를 쓰고 졸업식에 참가한 모스크바국제관계대 졸업생들. 훗날 외교 전문가로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인재들이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1944년 개교한 모스크바국제관계대는 해마다 입시에서 모스크바대와 1, 2위를 다투는 명문대다.
러시아에서 ‘공부 잘하고 집안 좋은’ 학생들이 입학하는 ‘귀족 학교’로 꼽힌다. 외교부 부속학교여서 특히 외교 인맥이 막강하다. 현재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과 세르게이 프리호드코 대통령외교보좌관이 이 학교 출신.
1954년에 한국학과가 설치돼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아나톨리 토르구노프 총장이 한국학 전공이고 전현직 주한 대사가 모두 이 학교 졸업생이다. 발레리 데니소프 전 북한 주재 대사와 게오르기 쿠나제 전 주한 대사는 외교관 생활을 마친 후 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