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대 상산고 이사장은 8월 경추(頸椎) 수술을 받았다. 9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부위가 뇌에 가깝고 마취 시간이 길어 만에 하나 잘못될 수도 있었다. 그는 입원에 앞서 학교법인 통장에 150억 원을 입금했다. 기숙사 및 체육관 공사대금 100억 원에 이사장이 없더라도 2, 3년 동안 학교가 돌아갈 수 있도록 운영비 50억 원을 보탰다.
자립형사립고(자사고)는 정부 예산에서 단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자사고를 선택한 학생들은 수업료를 평준화 학교의 3배 정도 낸다. 그러나 수업료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상산고가 자사고로 전환한 후 홍 이사장이 내놓은 사재는 300억 원에 이른다. 자사고를 지원할 정부 예산이 평준화 학교로 가기 때문에 그만큼 공교육의 건실화에도 기여하는 셈이다.
상산고 학생들은 입학 당시보다 2, 3학년 때 성적이 월등하게 향상됐음이 전국 모의고사 등에서 확인됐다. 우수한 학생들이 경쟁해 학업 분위기가 좋고 교사와 시설 등 교육 여건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민족사관고는 2006학년도 입시에서 놀라운 성적을 냈다. 민사고 국제반 학생 47명 가운데 18명이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스탠퍼드대 코넬대 듀크대 시카고대 등 미국 명문대에 합격했다.
공교육의 질이 떨어져 여유 계층에서는 자녀를 중고교 때부터 미국 사립학교에 보내는 학부모가 많다. 미국 사립학교는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합해 1년 학비가 4만∼5만 달러 든다. 조기 유학 붐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까먹는 것이다. 두 자사고의 성공은 해외로 빠져나가는 고급 교육 수요를 국내에서 충족시켜 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자립형사립고제도협의회(위원장 김신일 서울대 교수)의 확대 건의를 받고서도 미적거리던 교육인적자원부가 자사고 확대 방침을 어제 공식 발표했다. 김진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종교계 지도자를 만난 자리에서 “자사고를 현행 6개에서 20개 정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반대하는 것이 걸림돌이다. 그러나 전교조도 평준화의 큰 틀을 깨지 않으면서 공교육에 더 많은 재정이 돌아가도록 하는 제도에 끝까지 반대하기에는 명분이 약하다.
정부 재정이 열악할 때 공교육을 상당 부분 사립학교에 의존해 사학의 비율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 전국 931개 사립고등학교 전체를 일거에 평준화 제도의 밖으로 내보내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재정이나 교육 여건에서 준비가 안 된 학교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평가를 거쳐 자립할 실력을 갖춘 학교부터 자사고로 전환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02년 서울에서 19개교가 자사고를 희망했지만 유인종 전 서울시교육감이 반대해 서울에는 단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공정택 교육감은 서울의 강북 쪽에 자사고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도 강남·북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강북지역 자사고 설립을 지원하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서울에서 자사고로 갈 의지와 여건을 갖춘 학교로는 중앙고 이화여고 중동고 등이 꼽힌다.
자사고가 늘어나면 사학의 체질 개선도 기대된다. 경쟁 체제가 도입되면 사학들은 학생을 배정받고 재정을 지원받는 데 안주(安住)하지 않고 투명한 경영과 교육의 질 개선으로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을 받으려고 더 노력할 것이다.
자사고가 성공할 기반을 닦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 수업료의 상한선을 없애고 대학입시에서 내신으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해야 이 제도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자립형사립고제도협의회의 결론이다.
홍 이사장은 “학생을 배정받다가 건학 이념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하게 되니 신이 나서 돈을 써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사학 경영인들을 법으로 옭아맬 것이 아니라 신바람 나게 해 주는 것이 한국 교육의 세계적 경쟁력을 강화하는 해법(解法)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