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뉴욕 맨해튼 스튜디오에서 만난 재미교포 패션 디자이너 정두리 씨. 내년도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는 정 씨는 “가위질하고 재봉틀로 작업하면서 옷을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세계 패션업계를 이끌 유망주’의 스튜디오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소박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23일 뉴욕 맨해튼 38가에 자리 잡고 있는 재미교포 패션 디자이너 정두리(32) 씨의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정 씨는 직원들과 함께 내년 봄 패션쇼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직원이라고 해 봐야 모두 3명. 정 씨는 최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2006년에 주목받게 될 인물’에 패션업계를 대표할 인물로 선정됐다. 뉴스위크의 인물 명단에는 차기 영국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이론물리학자인 리사 랜들 하버드대 교수 등 각 분야의 쟁쟁한 명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 온 그는 최근 뉴욕 패션업계에서 ‘신세대 디자이너’로 주목받고 있다. 그에게 언제부터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느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스케치와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이 많아 항상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파슨스디자인학교에 입학했고 결국 디자이너의 길을 밟게 됐습니다. 창조적인 부문은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지금은 미국 투자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남동생도 어렸을 때 스케치를 곧잘 했어요.”
파슨스디자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처음에는 의류회사인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남성의류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러다가 미국 패션업계의 대부(代父)로 꼽히는 제프리 빈 씨에게 발탁되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우연히 피플 매거진이 주최한 디자인전에 공모했는데 뉴욕타임스가 평을 잘 써 줬어요. 그 기사를 보고 빈 씨 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같이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주저 없이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빈 씨와 함께 일한 기간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정 씨는 “전에는 옷을 디자인하는 것이 ‘일(job)’이었는데, 빈 씨와 일하면서 ‘패션(fashion)’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빈 씨는 제게 옷이 할 수 있는 일에는 경계가 없다는 점을 가르쳐 줬고, 나만의 것을 추구하도록 용기를 줬다”며 “전에는 옷을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빈 씨와 일할 때에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어떻게 옷을 만들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빈 씨와 6년 동안 일한 뒤 자신의 브랜드인 ‘두리(Doo Ri)’로 옷을 만들기로 하고 독립을 결심한 것.
정 씨는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과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항상 그의 선택을 신뢰하고 지원해 온 부모였지만 월급도 많고 모든 것이 보장된 곳을 떠나 불확실하고 고생스러운 길을 걸으려고 하는 딸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첫 스튜디오는 뉴저지에 있는 부모님의 세탁소 지하실이었다. 맨해튼의 비싼 사무실 임차료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씨가 디자인한 실루엣
뉴욕에 살면서 매일 ‘뉴저지 주 세탁소 지하실 스튜디오’로 출근했던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패션쇼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옷을 만드는 순간’은 전혀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정 씨는 “무엇보다 부모님의 희생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정문일 씨·그는 아버지 이름을 기사에 꼭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제가 패션쇼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돈을 주저 없이 지원해 주셨고 어머니는 옷을 만들 때 온갖 힘든 일을 도와주셨다”고 말했다.
어렵게 준비한 패션쇼는 다행히 언론들의 좋은 평을 받았고 첫 패션쇼 이후 3군데에서 팔렸던 ‘두리’ 브랜드는 이제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 쿠웨이트 한국 등 전 세계 30군데 매장에서 팔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갤러리아백화점에 매장이 있다.
그는 “두리 패션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독자적인 브랜드를 출범시킨 지 4년째라 아직은 답변하기가 어렵다”며 “지금은 계속 나만의 방식을 찾아 가고 있는 중이며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앞으로 장기적인 목표가 뭐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10년 후에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는 것.
“일반인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젊은 디자이너의 수명이 매우 짧아요.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매년 패션쇼를 앞두고 나오는 패션 캘린더를 보면 보통 200명의 젊은 디자이너가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는 조용히 사라집니다. 저는 그런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아요. 10년 후에도 이 자리에 남아 있게 된다면 대만족입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그는 “제일모직이 후원한 ‘삼성패션디자인펀드’ 수상자로 선정돼 패션쇼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원받게 돼 너무나 기쁘다”며 “한국에서도 미국에서처럼 재능만 있으면 언제든지 후원자의 지원을 통해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정두리 씨는
△1973년 서울 출생
△1977년 부모 따라 미국으로 이민
△1995년 파슨스디자인학교 졸업
△1995년 바나나 리퍼블릭 남성의류 담당 디자이너로 근무
△1996년 미국 패션업계 대부인 제프리 빈 씨
밑에서 일하기 시작
△2002년 두리 브랜드로 독립
△2004년 에코도마니 패션재단 수상자로 선정
△2004년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가 선정한 유명 디자이너 10인에 선정
△2005년 뉴스위크, 2006년 패션업계를 이끌 유망주로 선정
“패션의 경이로움 그녀가 선물하다”
■NYT-보그誌도 호평
“세탁소 지하실에서 출발해서 패션계의 유망주로, 젊은 디자이너가 선사하는 놀라움….”
최근 뉴욕 패션계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재미교포 디자이너 정두리 씨와 그의 패션을 소개하는 미국 언론들의 평가다.
정 씨를 ‘2006년 패션업계를 이끌 유망주’로 선정한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뿐만 아니다. 미국의 다른 언론매체들도 정 씨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쏟아내고 있다.
정두리 씨의 패션을 소개한 미국 신문 및 잡지 기사.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한 뉴욕 패션계에서 정 씨의 패션은 독특한 스타일로 많은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정 씨는 지난해엔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와 권위 있는 패션잡지 ‘보그’가 선정하는 ‘유명 디자이너 10인’에 뽑히기도 했다. 특히 정 씨에 대한 ‘보그’의 기대는 이례적이다.
2005년 정 씨의 가을 패션쇼에는 미국 패션업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그’의 편집장이 맨 앞줄에 앉아 지켜보기도 했다. ‘보그’ 편집장이 참석했다는 사실 자체가 해당 디자이너에게는 큰 영예다.
이 밖에 미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도 올해 9월 정 씨의 패션쇼를 별도 사진과 함께 크게 소개했다.
미국에서 부수가 가장 많은 USA투데이도 올해 8월 정 씨의 패션을 그가 디자인한 옷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정 씨는 여전히 “패션쇼에 대한 언론의 평가가 가장 긴장된다”고 말했다.
정 씨는 “모든 디자이너는 패션쇼를 한 뒤 뉴욕타임스와 같은 권위지, 그리고 패션전문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며 “항상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이 같은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