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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MK신화’ 일군 유봉식 日긴키산업신용조합 회장

입력 | 2005-12-28 03:01:00

일본 오사카 시 긴키산업신용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유봉식 회장은 “한일 갈등을 발전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이 힘을 모아 일본을 앞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사를 하려면 머리를 숙여야 한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마쓰시타전기 창업주가 생전에 자주 했던 말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이 ‘계시’를 가장 잘 실천한 이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친절을 앞세워 택시업계를 평정한 MK택시의 유봉식(兪奉植·77) 창업주, 현 긴키(近畿)산업신용조합 회장이다. 1995년 미국 타임지 선정 최우수서비스기업 등 수상 이력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많은 일본인이 인정하는 바다. 최근 교토(京都) ANA호텔 곽유지(郭裕之·88) 회장과 함께 고려대 일본학연구센터에 20억 원을 기부한 그를 찾아가 경영철학과 기부 취지에 관해 들어봤다. 곽 회장은 긴키산업신용조합의 비상근 부회장이다.》

긴키산업신용조합은 유 회장이 일본 금융권에서 여전히 차별받는 재일교포들의 자금 숨통을 틔우기 위해 곽 회장 등과 함께 뜻을 모아 설립한 것으로, 오사카 시를 순환하는 JR선 쓰루하시(鶴橋)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역 출구부터 죽 늘어선 불고기집들이 ‘코리안 타운’임을 말해 주는 동네다.

1층에서 비서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백발의 안내원이 벌떡 일어나 “6층에서 내리라”고 3번 이야기한 뒤 3번 머리를 숙였다. 6층에 닿자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 마중 나온 여비서가 허리를 굽혔다. 더도 덜도 어색할 것 같은, 딱 그만큼의 공손함이었다. 잠시 후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유 회장에게 맨 먼저 MK택시의 상징인 친절이 무엇인지부터 물어봤다.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친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인사입니다.”

―인사란 무엇입니까.

“인간성이자 인간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MK택시 운전사들에게 인사를 가르치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MK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적지는 ○○까지시네요.’ ‘오늘은 ○○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물건은 없으십니까.’

유 회장은 1976년 이 네 가지 인사를 빼먹으면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해 택시업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택시는 무뚝뚝함과 뻣뻣함의 대명사였다.

현재 일본 신용조합업계에서 최대 수익을 자랑하는 긴키산업신용조합의 최대 영업자산도 인사다.

“매일 오전 8시 20분이 되면 조합의 전 직원이 거리에 나가 시민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며 예금을 맡기는 일본인이 부지기수입니다. 대출 고객은 90% 이상이 교포지만 예금 고객은 60% 이상이 일본인입니다.”

유 회장은 하다못해 길을 묻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도 ‘우리 고객’이라고 직원들에게 늘 강조한다.

그러나 유 회장이 ‘굽히기만 잘하는’ 경영자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 회장은 규제 압력 회유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택시 요금 인하를 막는 교통행정 당국과 경쟁업체를 10여 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굴복시켰다.

‘관료 왕국’, 더구나 집단주의가 강한 일본에서 이런 무모함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는 왜 이런 고집을 부렸을까.

“나의 경쟁 상대는 늘 ‘마이카’였습니다. 택시가 아니었습니다. 마이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들이 부담 없이 탈 수 있는 수준으로 가격을 낮추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리고 마이카보다 더 편리하고 깨끗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이카에 밀려 도태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 회장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한일 갈등에 관한 해법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제시했다.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와 역사 왜곡 등은 모두 일본의 국력이 우리보다 앞서 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일본인은 누가 자신을 뛰어넘으려 할 때는 가차 없이 짓밟지만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되면 금방 포기하고 배우려 합니다. 일본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것만이 한일 갈등을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질소(質素)함과 근면 등 일본인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면서 2배, 3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유 회장은 민족대학인 고려대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는 활발한 연구 활동과 의식개혁 운동이 일어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곽 회장과 의기투합해 20억 원을 쾌척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 국민이 뜻을 모은다면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지역 주민들을 모시고 MK택시에 와서 친절 연수에 땀을 흘리는 시청 공무원들의 모습에서 그 싹을 본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내내 동석하고 있던 유 회장의 동생 유태식(兪台植·69) 긴키산업신용조합 부이사장이 1층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기자가 눈에 안 보일 때까지 마냥 그대로 서 있을 것 같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인사를 차릴 길이 없었다. 형제는 친절했다.

오사카=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 유봉식 회장은

△1928년 경남 남해 출생

△1943년 빈손으로 일본행

△1960년 교토에서 미나미택시 설립

△1963년 가쓰라택시 인수

△1977년 미나미택시와 가쓰라택시 합병 후 MK로 사명 변경

△2001년 긴키산업신용조합 회장

■ 경영 노하우

유봉식 회장의 경영철학서“택시 운전사는 파일럿과 같다. 우주보다 더 무겁고 큰 생명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유봉식 회장의 이 같은 지론은 오늘의 MK택시가 있게 한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경쟁업체를 몇 발짝씩 앞질러 온 서비스 혁신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1960년 유 회장이 택시 10대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 최대의 골칫거리는 운전사들의 무단결근, 지각, 조퇴였다. 운전사들이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 회장은 1969년 한 부동산 업체가 내놓은 집 46채를 모두 사들여 싼 가격에 사원들에게 내놓았다. 18년간 월 3만4000엔씩 달돈(월부금)을 내면 집주인이 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신청자는 전혀 없었다. 당시 택시 운전사의 월급이 7만 엔에 불과해 달돈을 내고 나면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 이래서는 ‘마이카’와 경쟁할 만큼 친절한 운전사를 키워 내기 어렵다고 유 회장은 판단했다.

유 회장은 당시 은행 지점장에 필적하는 12만 엔 수준으로 운전사들의 월급을 전격 인상했다. 물론 수지가 맞을 리 없었다. 주위에서는 몇 달 안에 망할 것이라는 말이 무성했다.

그는 매출액 증대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택시는 손님이 타건 안 타건 드는 비용이 일정하기 때문에 매출액을 늘리면 수익이 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유 회장은 단거리라도 고객이 손을 들면 반드시 태우라고 운전사들에게 호소했다.

또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전사의 자택에 차고를 두는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교통 당국이 제재를 걸고 나섰지만 1년간 싸운 끝에 마침내 허가를 얻어냈다. 유 회장은 “고객에게 친절하기 위해 운전사들을 잘 대우해 주는 것이 요체였다”며 “서비스 혁신 아이디어는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오사카=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MK택시의 서비스혁신 발자취▼

MK택시 운전사들은 손님이 타고 내릴 때 밖으로 나와 직접 문을 열어준다. 나고야의 한 택시 운전사가 하차하는 손님을 위해 공손하게 문을 열고 있다.

△1971년 자택 교대제 실시 △1972년 장애인 우선승차제 실시 △1973년 ‘움직이는 정보백화점’ 실시 △1975년 학사 운전사 채용 △1976년 네 가지 인사하기 운동 실시 △1978년 구급택시 발족 △1982년 운임 인하 신청 △1983년 고급디자인 제복 착용 △1985년 영어회화 택시 운행 △1990년 교토역에 MK귀빈실 개설 △1992년 전 차량 금연 실시 △1994년 요금 인하 허가서 받음 △2001년 GPS 무선자동배차시스템 도입 △2003년 기모노 할인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