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서대문형무소서 헌화‘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유족이 27일 이 사건에 대한 법원의 재심 결정 뒤 사형이 집행된 서울 옛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사건에 대한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은 사법부 과거 반성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 사건은 유신시대에 자행된 ‘사법 살인’의 대표적 사건으로 꼽혀 왔다.
▽“앞으로의 재판이 더 중요”=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이 올해 9월 취임식에서 사법부의 과거사 문제를 언급했을 때 인혁당 사건은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대표적 사건으로 거론됐다.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혹평했다.
법원에서는 “재심 개시 결정은 시작에 불과하며 ‘사법부의 진정한 과거 청산’을 위해서는 앞으로의 재판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재심 결정을 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사실상 대법원 판결의 효력이 상실된 셈이지만 다시 재판을 하기로 한 이상 피고인들의 혐의를 일일이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의 대표적인 혐의는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4가지지만 각 혐의에는 수많은 공소 사실이 관련돼 있다. 공소장만도 550쪽에 이른다.
▽비슷한 사건 재심에 어떤 영향 미치나=법원에는 인혁당 사건과 비슷한 사유로 재심이 청구된 사건들이 더 있다. 이장형(74) 강희철(48) 씨는 간첩 활동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가석방된 뒤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올해 8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이 사건은 현재 서울중앙지법과 제주지법에 각각 계류돼 있다.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에 연루돼 21년간 복역한 이수근 씨의 처조카 배경옥(67) 씨도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이 사건을 맡고 있으며 재판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들 사건의 재심 청구 사유는 모두 “수사기관의 고문 등으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재심 청구 사유만으로 보면 인혁당 사건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인혁당 사건의 경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조사로 고문 등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가 객관적으로 입증됐다. 고문 등에 대한 객관적 입증이 없는 한 이들 사건의 재심 개시를 낙관할 수는 없다.
▽“사법부가 더 원망스러웠다”=유족들은 재심 개시 결정 직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삶도 억울했지만 30여 년간 우리의 목소리를 외면한 사법부가 더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우홍선 씨의 부인 강순희 씨는 “1심 법정에서 ‘괜찮다’며 손을 흔들던 남편의 얼굴이 대법원 선고 날에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며 “박근혜(朴槿惠) 씨는 지금이라도 자기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저지른 일에 대해 유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씨 등 유족 40여 명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30년 전 인혁당 관계자들의 사형이 집행된 서울 서대문구 옛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을 찾아 헌화했다.
인혁당 진상규명위원회 정화영 위원장은 “다음 달 사형 집행 당시 작성한 8명의 유언장을 정부가 조작한 증거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인혁당 사건: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 유린 사건으로 ‘사법 살인’으로도 불린다. 1975년 중앙정보부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라는 학생운동 조직의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한 뒤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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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절차 어떻게▼
재심(再審)이란 말 그대로 이미 판결이 이뤄진 사건을 다시 재판하는 절차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사건은 유족들이 1심 판결을 문제 삼아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한 경우다. 항소심(2심) 판결에 이의가 있으면 고등법원에, 상고심(3심) 판결에 이의가 있으면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면 해당 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다.
법원이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항고’ ‘재항고’ 절차를 거쳐 최대 3번까지 재심 개시 여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수 있다.
형사 사건의 경우 재심 개시가 결정되면 피고인의 형 집행이 정지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행법의 재심 개시 요건은 까다롭다.
형사소송법 420조는 판결의 증거 등이 위·변조된 것이 증명될 경우, 무고로 인해 유죄 선고를 받은 사건과 관련 무고죄가 증명된 경우, 수사 과정에 수사관의 가혹행위 등이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경우 등 7가지 재심 개시 이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재심 개시 이유는 별도의 법원 판결로 확정돼 객관적으로 증명돼야 한다. 다만 인혁당 사건처럼 수사관의 위법행위에 대한 공소시효가 완성돼 법원의 확정 판결을 얻어낼 수 없을 경우에는 별도의 증명이 필요하다.
인혁당 사건의 경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법원의 확정 판결을 대신해 객관적인 증명의 역할을 한 셈이다.
재심 재판은 통상적인 재판 절차와 같이 진행된다. 다만 법원이 재심 사유를 인정한 것이 참작되기 때문에 기존 판결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