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Kuho)’는 국내에서 몇 안되는 기업형 디자이너 브랜드다. 앙드레 김을 비롯한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는 대부분 소규모 매장의 ‘부티크’다.
이런 옷은 유명하지만 개성이 강하고 비싸서 입어 보는 게 쉽지 않다. 그에 비해 구호는 소규모 부티크로 출발했으나 제일모직과 손잡은 뒤 지금은 백화점에서 유통되고 있다. 부티크가 대중성을 얻은 것이다. 여기에는 제일모직의 자본과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그 구호를 만든 이가 디자이너 정구호(43·제일모직 상무·사진) 씨다.》
○ 기본에 충실한 단순미
구호는 외국 명품 브랜드만큼 비싸지는 않으나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장미희 이미연 김지호 등 톱스타들도 좋아하고 20, 30대의 전문직 여성과 미시들이 자주 찾는 고급 브랜드다. 특히 디자이너 건축가 무용수 등 창의적 부문에서 활동하는 이들 가운데 팬이 많다.
이들이 구호 브랜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도회적이고 지적인 이미지 덕분이다. 색상도 모노톤으로 절제되어 있다. 단순하면 자칫 심심하고 건조해 보일 수 있지만 구호의 옷은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백이 있음에도 허전하지 않은 한국화처럼.
정 씨는 이런 스타일을 형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 “내가 패션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패션 전공자가 아니어서 패턴 장식 색상의 정형에 대한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옷의 기본인 구조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 끝에 독창적인 단순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단순하면서도 꽉찬 느낌의 옷을 만들 수 있었다.
○ 스타일은 구조를 따른다
지난해 5월 구호의 가을 겨울 패션쇼. ‘북쪽으로의 여행’이라는 주제 아래 티베트와 러시아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반영했다. 검은색을 주조로 한 세련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패션 디자인에서 구조란 무엇인가. 정 씨는 옷이 몸에 편안하게 맞는가, 실루엣이 안정적인가, 옷의 본질과 개성이 흐려지지 않는가에 관한 문제이라고 말한다.
재료도 새롭게 보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선택한다. 가공 방법도 마찬가지다. 그는 옷의 스타일을 바꾸기보다 재단 방법을 바꾸려고 한다.
그의 스타일은 특정 스타일을 추구해서 태어난 게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마치 건축가가 건물의 기능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로서 아름다움과 개성적인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얻는 것처럼. 전문가들이 세월이 흘러도 촌스럽지 않을 브랜드로 구호를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올해 5월과 11월에 열린 구호 패션쇼에서 그는 평소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옷을 선보였다. 색상도 다양해졌고, 장식적 아름다움과 재미를 주는 요소가 더해졌다. 이제 그는 탄탄한 기본을 토대로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 영화 ‘스캔들’의 화려한 의상도 제작
지난해 11월, ‘2062년, 미래의 로맨스’라는 주제로 올해 봄여름 시즌을 겨냥한 패션쇼. 기존의 담백한 스타일과 달리, 장식적인 순백색 옷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는 미국 휴스턴대에서 광고 미술을 전공한 뒤,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패션 디자인이었다. 그는 뉴욕의 옷매장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의 특징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1997년 귀국해 뒤늦게 패션 디자이너로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그는 10년도 안된 패션 경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의 브랜드를 가질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는 패션 쇼 외에도 한국 영화 ‘정사’ ‘텔미썸딩’ ‘쓰리’에서 의상을 맡아 주인공의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캔들’에서는 17세기 조선 사대부가(家) 여성들의 화려한 옷을 정확한 고증에 따라 재현했고 소품과 상차림도 직접 디자인했다. 이처럼 디테일에 대한 철저한 작업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정 씨의 패션 디자인 경력은 길지 않다. 그러나 그는 광고 그래픽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부문에서 디자인에 천착해 왔고, 이를 통해 기본에 충실한 디자이너의 토대를 갖췄다. 최근 그가 브랜드 ‘구호’를 통해 새로운 실험과 변형을 가미하려고 하는 시도도 튼튼한 기초 덕분일 것이다.
소수 고객을 위한 부티크에서 출발한 그는 지금 연매출 200억 원대의 기업형 브랜드를 지휘하고 있다. 그는 “옷은 사람의 성격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며 “부티크를 할 때보다 타협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대중에게 옷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는 의미도 크다”고 말한다.
김 신 ‘월간 디자인’ 편집장 kshin@design.co.kr
사진 제공 디자인 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