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창칼이 부딪치고 화살과 돌이 날고 있는 가운데라도 사신을 막는 법은 아닙니다. 한왕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한번 들어 보고 사신을 내쫓아도 늦지 않습니다.”
팽성에서 군사와 군량을 끌고 먼 길을 온 공이 있어서인지 패왕이 그런 계포의 말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좋다. 그럼 한왕의 사신을 들게 하라.”
그렇게 육고를 불러들였으나, 그의 말을 귀담아들을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패왕은 육고가 군막 안으로 들어서자 눈을 부라리며 윽박지르기부터 했다.
“한왕은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는가? 기어이 그 목이 성고성 문루에 높이 매달려야 천명을 깨달으려는가?”
“군명(君命)을 받고 온 사신에게 온당한 물음이 못됩니다만 물으시니 대답하겠습니다. 천명은 호기나 허세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고가 조금도 겁먹는 기색 없이 그렇게 받았다. 큰 키와 희멀쑥한 얼굴도 육고의 응대에 알 수 없는 품위를 더하였다. 패왕이 무턱 댄 윽박지름에서 벗어난 말투로 다시 물었다.
“그럼 천명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남의 왕 노릇을 하는 이(왕자·王者)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소이연·所以然)이 있고, 또 반드시 가야 할 길(왕도·王道)이 있습니다. 그 까닭을 갖추고, 그 길을 가는 이에게 마침내 천하가 돌아가는 법입니다.”
“틀림없이 그대는 실속 없이 말만 많은 유가(儒家)의 무리 가운데 하나이겠구나. 그대는 한왕을 위해 과인에게 인의예지라도 가르치러 온 것이냐?”
그와 같은 육고의 말에 패왕이 다시 실쭉해진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래도 육고는 별로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받았다.
“우리 대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하 창생을 위해서입니다. 또 인의예지가 아니라 왕도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말하라. 무엇이 천하 창생을 위한 왕도냐?”
그러자 육고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지금 천하는 무도한 진나라의 폭정에서 벗어나자마자 모진 전란에 휩쓸려 여러 해째 시달리고 있습니다. 땅은 애꿎은 젊은이들의 피로 젖고, 하늘은 집과 재물을 불사르는 연기로 어둡습니다. 이때 천하 창생의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는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란의 고통으로부터 창생을 구해 주는 이일 것입니다. 왕도가 달리 있지 아니합니다.”
“외손바닥으로는 손뼉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전란이라면 맞서 싸우는 쪽이 있기 마련, 혼자서는 그만두지 못한다. 그런데도 전란을 끝내라면 누가 누구에게 항복하라는 것이냐?”
패왕이 다시 무언가를 참아 주고 있다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육고가 어딘가 허둥대는 목소리로 받았다.
“어느 한편이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맺고 각기 군사를 물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사신을 보내 화평을 요청할 것도 없지 않느냐? 한왕이 스스로 군사를 물려 관중으로 돌아간다면 이곳의 싸움은 끝난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