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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입력 | 2005-12-31 03:00:00

그림 박순철


“우리 대왕의 부모님 되시는 태공 내외분과 왕후 되시는 여후(呂后)께서 초나라 군중(軍中)에 갇혀 계신 지 벌써 두 해가 넘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태공 내외분과 여후께서 풀려나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또 초나라와 한나라 두 군대 사이에 화평이 믿을 수 있게 되려면 서로 돌아서는 등 뒤를 치지 않는다는 약조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싸움터에서는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였으나, 화평에는 속임수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육고가 거기까지 말하자 패왕이 이제는 완연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렇다면 과인은 일껏 손에 넣은 귀한 볼모를 모두 놓아 보내고, 제 소혈로 달아나는 너희를 쫓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해야 한다는 말 아니냐? 그게 네가 말한 왕도며 천명을 받는 길이란 말이냐?”

육고가 무언가에 움찔하는 것 같으면서도 애써 기죽지 않은 목소리로 언변을 풀었다.

“군자는 남의 사친(事親)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그 효도를 이루게 하며, 그 지아비 지어미를 가르지 않아 부부의 도리를 다하게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남의 임금노릇 하려는 이이겠습니까? 거기다가 패왕과 우리 대왕께서는 돌아가신 무신군(武信君) 앞에서 형제의 의를 맺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 태공 내외분과 여후가 한낱 볼모에 그치겠습니까? 화평의 약조도 그러합니다. 지금 천하 뭇 백성들은 제후들이 전쟁을 멈추고 싸움터에 끌려간 자식과 형제와 지아비가 돌아올 날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평을 이루는 것은 곧 민심에 따르는 것이요, 민심을 따름은 또한 천명을 받드는 일입니다….”

그때 갑자기 패왕이 시뻘건 얼굴로 소리쳤다.

“닥쳐라. 그 머리를 어깨 위에 붙여 돌아가려거든 이제 더는 혀를 놀리지 말라!”

그리고는 육고가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벼락 치듯 꾸짖었다.

“네놈이 사신이 아니었더라면 과인은 네놈을 목 베어,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놀린 죄를 벌하는 본보기로 삼았을 것이다. 돌아가거든 네 주인 유방에게도 전하거라. 과인은 반드시 이 싸움을 끝내고 천하를 평온하게 할 것이나, 그날은 유방의 목이 저잣거리 높이 매달리는 날이 될 것이라고. 또 전하거라. 과인의 칼이 더러워지지 않게 유방은 그 목을 씻고 기다리라고.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끌어내 광무간 아래로 내던져 버려라!”

패왕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불길이 뚝뚝 듣는 듯한 두 눈을 부릅떠 육고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육고는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만큼 무참하게 초나라 진채에서 내쫓겼다. 육고가 무안한 얼굴로 돌아가자 한왕의 얼굴은 실망과 걱정으로 어두워졌다. 그때 장량이 가만히 한왕을 위로했다.

“태공 내외분을 구하고 화평을 얻어 관중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뻗대는지 알 수 없으나, 머지않아 항왕은 싫어도 대왕의 뜻을 받들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어째서 그리 될 수 있단 말이오?”

한왕이 다시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장량을 보며 물었다. 장량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