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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문 직업학교를 가다]日공학원 만화애니메이션科

입력 | 2006-01-02 03:00:00

만화애니메이션과의 전용 실습공간인 만화디자인관. 3D 컴퓨터그래픽 설비, 디지털 편집장치, 고성능 음향기기 등 최신 기자재가 가득하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아톰’ ‘마징가Z’ ‘캔디’….

한국의 386세대는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만화영화 캐릭터의 사연에 웃고 울고 가슴 졸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로 시작되는 캔디의 주제가는 당시 초등학생 소녀들에게 ‘국민동요’와 같은 대접을 받았을 정도.

비슷하거나 조금 앞선 시기에 자란 일본의 어린이들도 그랬다. 일본의 중년 남성들이 어렸을 때 ‘무쇠팔 무쇠다리 로켓 주먹’의 마징가Z는 ‘우리들을 위해서만 힘을 쓰는 착한 로봇’의 상징이었다.

그러고 보면 일본제 만화영화는 알게 모르게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를 정서적으로 이어 준 끈이었는지도 모른다.

만화애니메이션과의 만화 전공 학생들이 각자의 실습작을 모아 펴낸 만화책(위)과 애니메이션 전공 학생들이 집단창작 방식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DNA’의 DVD타이틀.

일본 도쿄(東京) 오타(大田)구의 번화가인 가마타(蒲田) 역 근처에 자리잡은 일본공학원 전문학교(www.neec.ac.jp). 2년제 직업학교인 이곳은 영상 소프트웨어 분야의 인력양성 기관으로 업계에서 명성이 높은 곳이다.

특히 2000년 4월 개설된 종합애니메이션과(2006년 4월 학기부터 만화애니메이션과로 명칭 변경 예정)는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본에서도 교육 내용이 충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현역 인기 만화가와 애니메이터들이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실습 위주로 가르쳐 후발 주자라는 단점을 메웠다.

취재차 찾아간 기자에게 전임 교원인 오니시 도모유키(大西智之) 씨는 브리핑에 앞서 우선 시설부터 둘러볼 것을 권했다. 우중충한 실습실과 강의실 몇 곳 정도를 예상했던 기자는 ‘만화디자인관’에 들어선 순간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와 첨단 설비에 압도됐다.

7층짜리 건물 전체가 학생들의 실습 공간으로 꾸며진 것은 물론 웬만한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뺨칠 만큼 최신식 장비들이 가득했다.

7층은 아틀리에, 6층은 컴퓨터디자인 실습, 5층은 애니메이션 실습, 4층은 만화 작업, 3층은 디자인 스튜디오, 2층은 컴퓨터그래픽 작업…. 1층 로비 한편의 스튜디오엔 3D 컴퓨터그래픽(CG) 및 디지털 편집장치, 음향설비가 두루 갖춰져 있었다.

층마다 휴식 공간을 겸해 조성된 갤러리 라운지엔 학생들이 창안한 기기묘묘한 캐릭터가 가득 들어서 저마다 솜씨를 뽐냈다.

만화애니메이션과에 등록한 학생은 1학년 300명, 2학년 320명을 합해 620명.

특정 학과만을 위해 건물 전체를 할애한 것은 만화 애니메이션과를 간판으로 키우려는 학교 측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오니시 씨는 설명했다.

실습실에선 2학년생들이 2월 말 발표할 상영시간 10분 분량의 졸업기념 작품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20명이 한 조가 돼 기획안 작성과 캐릭터 고안, 스토리 설정 및 전개 등 애니메이션 제작의 모든 과정을 나눠서 해결하는 집단창작 방식이다.

“21세기 세계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이끈다.”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에서 교육 내용이 가장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공학원 전문학교의 만화애니메이션과. 첨단산업으로 주목받는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미래 주역의 포부를 키우고 있는 학생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한 꿈의 창조’를 다짐하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제공 일본공학원 전문학교

애니메이션 작업팀은 손으로 그린 그림을 동화상으로 바꾸느라 마우스를 부지런히 놀렸고, 디지털 작업팀은 등장인물과 배경에 색깔을 입히고 음향을 삽입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완성된 작품들이 3월 말 열리는 도쿄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출품되기 때문인지 팀원들은 수시로 머리를 맞대며 작품 콘셉트를 상의했다.

만화 전공의 2학년생인 다마나 아오이(玉名葵) 씨는 “다른 만화학교에서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는 식인데 이곳에선 매주 한 차례 시나리오 작가의 강의가 개설돼 있어 작품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만화애니메이션과는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디자인 등 3가지 전공으로 나눠져 있다.

학생은 2학년의 경우 만화 80명, 애니메이션 100명, 캐릭터 디자인 140명이다. 첫 학기엔 전공을 불문하고 세 분야의 기초 과목을 모두 소화한 뒤 2학기부터 전공을 정하게 된다.

“학생들에게 최대한의 선택권을 주고 인접 분야의 지식도 폭넓게 쌓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제도입니다. 입학할 땐 애니메이션 전공을 희망했다가 나중에 캐릭터 디자인 등으로 관심영역이 바뀌는 학생이 적지 않거든요.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서로 통하는 만큼 두 분야의 지식을 함께 배워 두는 것이 나중에 현업에서 일할 때 도움이 됩니다.”

학교 측이 첨단장비 못지않게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게 실력파 강사진이다. 전임 교원 8명 외에 외부에서 초빙된 50여 명의 강사는 일본의 ‘아니메 마니아’(만화광) 사이에 인기가 높은 전업 만화 작가와 애니메이션 제작업체의 베테랑 전문가로 구성됐다.

애니메이션 감독 7명, 만화가 11명, 캐릭터 디자이너 4명을 비롯해 일러스트레이터, 촬영감독, 배경미술 전문가, 컬러코디네이터 등이 과목별로 포진해 있다. 작품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심리학을 전공한 카운슬러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까지 초빙했다.

애니메이션 전공 1학년에 재학 중인 허남주(許男朱·23·여) 씨는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던 애니메이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건국대 영문과를 휴학하고 일본행을 택한 케이스. 먼저 입학한 친구의 소개로 들어왔는데 1년간 이 학교에 다니면서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한다고 말했다.

“강사들이 만화의 기초부터 가르쳐 주기 때문에 기본적인 소질만 있으면 초보자라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어요. 포토샵을 포함해 여러 가지 디지털 장비를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것도 유익했습니다.”

그는 “도쿄의 물가가 비싸서 유학 생활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지만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라면 도전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취업 맞춤형 커리큘럼▼

올해 3월 일본공학원 전문학교의 만화애니메이션과를 졸업하는 한국인 학생은 남녀 각각 1명씩 모두 2명. 1학년엔 한국 학생 3명이 재학 중이다.

1인당 1대씩 배정된 실습실의 전용 컴퓨터 앞에서 졸업기념 작품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2학년 학생들(왼쪽, 오른쪽 위). 한 남학생이 동료 여학생의 실습 작품을 보며 품평하고 있다(오른쪽 아래). 학생들은 작업을 하는 도중에 의문이 생기면 동료 및 강사와 작품 콘셉트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졸업반의 2명은 지난해 11월경 일찌감치 일본 애니메이션 업체 취업이 확정됐다. 다만 현장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시스템이라 보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관련업계 제휴로 취업 유리=졸업생들이 가장 많이 진출하는 직종은 애니메이터. 디지털 촬영 및 편집, 제작진행(프로듀서), 컴퓨터그래픽(CG) 디자이너로도 취업한다. 취업률은 애니메이션 전공이 90%대로 가장 높고 만화와 캐릭터 디자인은 70% 선. 요즘은 게임소프트 제작 업종이 각광을 받으면서 이 학과에서도 캐릭터 디자인의 인기가 높아지는 추세. 만화 전공 학생들은 전업작가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취업률이 낮다.

외부 강사들이 평소 눈여겨본 학생을 자신과 연관이 있는 업체에 추천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이 학교의 강점. 애니메이션 제작사, 디지털영상 분야의 인재 파견회사 등과 제휴 관계를 맺고 있어 취업에도 유리한 여건을 갖고 있다.

▽실습60% 강의40%로 교육=주임 교원인 가와이 마사타카(川合正剛·30) 씨는 “졸업 후 곧바로 현장에 투입돼도 제 몫을 다하는 인재를 키운다는 게 교육 방침”이라며 “교육 내용은 실습 60%, 강의 40%로 배분된다”고 소개했다.

일단 입학하면 ‘만화의 기본은 그림 그리기’라는 원칙에 따라 데생부터 배우고, 이어 누드를 그리는 과정도 이수해야 한다.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노하우를 습득하려면 인체 묘사가 필수라는 취지에서다. 1학년 때 전공별로 각종 장비의 활용법을 익히고 다양한 실습 경험을 쌓는 데 주력한다면 2학년 때는 실제 작품 제작이 중심이 된다. 커리큘럼상의 실습 시간이 주당 18시간으로 적지 않지만 방과 후 작업까지 합하면 실습 비중이 일본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게 학교 측의 설명.

이론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특히 ‘작품 및 작가 연구’ 수업에서는 공상과학, 액션, 순정 등 장르별 거장들의 작품을 분석해 연출 기술과 특수효과, 화면 구성 등의 기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학생들의 선호도가 높다. 만화가 또는 애니메이터로 데뷔할 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수학여행을 떠나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이벤트인 ‘아니메 엑스포’에 참가한다.

▽시험없이 서류전형으로 신입생 선발=추천 입학원서는 매년 10월초, 일반 입학원서는 11월 초부터 접수한다.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고 서류 전형만으로 합격자를 결정한다. 물론 외국인 학생들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필수. 1년간 현지 어학연수를 마친 뒤 입학하는 게 통상의 관례다.

학비는 입학할 때 입학금 20만 엔, 1학기 수업료 30만 엔, 실험실습비 10만 엔, 기타(시설설비비) 등을 합해 70만2670엔을 내야 한다. 2학기부터는 수업료와 실험실습비 등으로 약 50만 엔이 든다.

도쿄 외곽 하치오지(八王子)에 있는 일본공학원 전문학교의 하치오지 캠퍼스에도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운영되는 만화애니메이션과가 설치돼 있다.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교육의 질 日서 최고 자부…한국 유학생들 환영합니다”▼

“역사는 짧지만 교육의 질은 ‘일본 1등’이라고 자부합니다. 우리 졸업생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어요.”

가와이 마사타카(사진) 만화애니메이션과 주임 교원은 “다른 학교에선 찾아보기 힘든 톱클래스의 강사진과 만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학생, 최신 장비가 조화를 이룬 게 일본공학원 전문학교의 매력”이라며 학과 자랑에 열을 올렸다.

참신한 감각이 중시되는 특성을 반영한 듯 전임교원 9명은 모두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다. 학생들과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선후배처럼 격의 없이 어울린다.

“산학협동 차원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각종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전문가들을 강사로 파견해 줍니다. 학생들에게 현장실습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업체들의 제의도 늘고 있습니다.”

가와이 주임은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한 ‘포켓 몬스터’를 비롯해 여러 작품의 원화(原畵) 제작에 참여한 실력파. 외부 강사 자격으로 이 학교 강단에 섰다가 차세대 애니메이터를 양성하는 일에 흥미를 느껴 2년 전 전임 교원이 됐다.

그는 “일본의 현역 애니메이터 중에는 작품 제작에 매달리느라 자신의 뒤를 이을 후배 키울 시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적지 않다”며 “일본공학원의 교육시스템은 이런 현장의 욕구를 실제 직업교육으로 연결시킨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공학원 측은 한국, 대만 등 인접국 학생들을 본격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지난해 4월 국제교류센터를 만들었다. 가와이 주임도 지난해 12월 경기 고양시 한국국제전시장(KINTEX)에서 열린 ‘세계 전문교육기관 엑스포(WPEE)’에 참가해 만화애니메이션과의 장점을 소개한 바 있다.

“지금까지 가르친 한국 학생들은 배우려는 열의가 강하고, 손놀림도 빨라 언젠가 대성할 재목이 많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학 중 생활비 조달이 쉽지 않은 데다 일본 프로덕션의 초봉도 넉넉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요.”

그는 “한국에는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일본에 비해 적다고 들었다”며 “외국에서의 힘든 여건을 각오하고 만화에 대해 열심히 배울 자세가 돼 있는 학생이라면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