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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과학이 희망이다]불 밝히는 연구단지

입력 | 2006-01-03 03:03:00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개발(R&D)특구에 있는 30여 개 연구원의 과학자들은 ‘황우석 파문’의 충격 속에서도 연구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대덕R&D특구 내 LG생명과학기술연구원의 실험실. 대전=김미옥 기자


《박사와 석사급 연구원 2만 명이 모여 살아 ‘박사 동네’로 불리는 곳.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북대전 톨게이트로 빠져나가면 사방에 연구단지와 벤처기업이 죽 늘어서 있는 ‘대한민국 과학의 메카’를 만나게 된다. 대전 유성구 대덕 연구단지다. ‘황우석(黃禹錫) 파문’으로 많은 국민이 충격에 빠졌던 지난해 말, 본보 취재팀은 ‘과학의 새로운 희망’을 취재하기 위해 이틀 일정으로 이곳을 찾았다. 1973년 840만 평 규모로 세워진 대덕 단지는 지난해 7월 대덕연구개발(R&D)특구법 발효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대덕테크노밸리와 대전 3, 4산업단지 등을 포함해 특구 면적도 총 2130만 평으로 늘어났다.》

‘황우석 쇼크’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 교수 보도가 시작된 12월 초부터 꼬박 일주일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1월부터 이곳에선 황 교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설마 했던 일들이 사실로 드러나니 과학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더군요. 남편과 밤을 꼬박 새우며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최근까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박사연구원으로 일하다 대덕R&D특구본부로 자리를 옮긴 김유숙(金裕淑) 박사의 말이다.

남편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11년간 일하고 있는 김진석(金辰錫·물질량표준부장) 박사. 김 박사 부부는 황 교수의 태도에 배신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김 박사!’라고 부르면 앞에 가던 사람 10명 중에 7명은 뒤를 돌아본다는 이곳은 ‘황우석 쇼크’에도 불구하고 한국 과학의 희망으로 꼽힌다.

지난해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아인슈타인 얼굴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을 선보인 오준호(吳俊鎬·기계공학) 교수를 찾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휴머노이드 로봇연구센터에서 만난 오 교수는 직접 만든 로봇을 테스트하느라 박사과정 및 석사과정 학생들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과학은 신비롭고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황 교수가 너무 ‘오버’하는 바람에 연구결과의 싹을 틔우기도 전에 좌절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는 황우석 파문 이후 일반인에 대한 로봇 시연(試演)을 자제하고 있었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언론과의 인터뷰도 줄일 계획이란다.

“대덕은 정부 출연 연구소뿐 아니라 대학과 벤처단지가 함께 모여 있어 연구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오 교수는 대덕 연구단지가 미국의 실리콘밸리처럼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최첨단 휴대 인터넷 기술인 와이브로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기술 개발에 성공해 한국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밤늦은 시간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암, 당뇨병 같은 질병과 연관 있는 특정 유전자를 선별하는 최첨단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과학계의 주목을 받은 ETRI 박선희(朴善熙) 박사.

그는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집에서 업무용 컴퓨터에 연결해 실험을 한다”면서 “한밤중에 연구실로 달려와 직접 실험을 하는 연구원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정부 출연 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원들이 따로 노는 ‘고립된 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시작으로 담장을 허물기 시작했다. 연구 성과를 잘 공유하지 않던 풍토를 없애기 위한 노력이 뚜렷하다.

대덕R&D특구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박인철(朴寅哲) 특구본부 이사장은 “처음엔 연구소들이 상당히 배타적이었지만 특구가 출범한 뒤 연구소끼리 장벽을 허무는 소규모 연구 모임이 부쩍 늘어났다”고 전했다.

대전=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대덕 R&D 특구는

대덕연구단지는 농업국가에서 탈피해 ‘과학 입국’을 꾀하려는 정부 방침에 따라 1973년 탄생했다.

선진국들이 핵심기술 이전을 꺼려 자체 기술 개발이 절실하던 때였다. 연구원들에 따르면 당시 이곳은 ‘도둑이 숨을 공간이 없을 정도’의 황무지였다.

1978년 표준과학연구원, 원자력연구원 등 5개 연구기관의 입주를 시작으로 정부 출연 연구소가 들어섰다. 1991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들어서면서 종합 연구단지의 기틀이 마련됐다.

대덕연구단지는 1980년대 초까지는 선진국을 뒤따르는 연구에 중점을 뒀다. 이후 전전자교환기(TDX)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상용화 등 많은 연구업적을 내놓았다.

대덕연구단지가 중요한 변신을 한 것은 2000년 전후로 벤처 열풍이 불었을 때다. 적잖은 박사급 연구원이 연구실을 나와 창업 대열에 몸을 실었다. 기술 하나만 믿고 창업했지만 대부분 현실의 ‘매운맛’을 보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 와중에 성공 사례가 속속 나오면서 대덕단지는 종전의 단순한 ‘연구도시’에서 ‘산학연(産學硏) 협동단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에는 오랫동안 갈망하던 특구로 지정됐다. 앞으로의 목표는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 첨단 도시로의 비상(飛上)이다.

대전=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