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감정 노동 종사자들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항상 웃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2004년 4월 경부고속철도 개통식을 앞두고 승무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승객을 맞는 인사 시범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네 아이라면 100만 원어치를 사주겠어? 왜 안 말렸어? 난 모르니까 네가 영수증 들고 우리 집으로 와서 다 환불 처리해.”
대형백화점 아동용품 매장에 근무하는 차모(26·여) 씨는 지난해 9월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고객의 항의는 ‘테러’에 가까웠다.
전날이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아이 2명을 데리고 매장에 왔다. 부부는 잠바와 바지, 셔츠 등 약 100만 원어치를 샀다. 그러나 차 씨는 아이 엄마의 못마땅한 표정이 맘에 걸렸다. 아이 엄마가 고른 옷을 남편이 모두 무시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 엄마는 바로 다음 날 전화를 걸어와 남편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차 씨에게 퍼부었다.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이 난무했고 ‘못 배운 주제에…’, ‘매장 점원 따위가…’와 같은 인신공격이 쏟아졌다.
고객 때문에 웃고 고객 때문에 운다. 감정 노동 종사자들의 행복은 고객에게 달렸다. 롯데백화점 매장 직원들이 본점 VIP휴게실을 찾은 손님과 담소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차 씨는 정신이 쏙 빠져 멍하니 듣다가 전화를 끊었다.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고객을 대했는데…. 너무 억울해 부서져라 책상을 내리쳤다.
호텔에 근무하는 곽모(25) 씨는 1년에 한두 차례는 꼭 ‘불량 고객’의 행패를 경험한다. 지난해엔 법조계에 있다는 고객한테 당했다. 안내를 하는데 그 고객이 어깨동무를 했다.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그러더니 “너희들 미팅할 때 나는 열심히 공부해 이 자리에 올랐다. 왜? 아니꼬우냐?”라며 비아냥대는 것이 아닌가. 곽 씨는 그냥 웃기만 했다.
판매, 서비스, 영업, 마케팅 등의 직종은 고객을 직접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늘 자신을 고객에게 맞춘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감정을 억제하고 항상 서글서글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이런 직종을 ‘감정 노동’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감정 노동 종사자는 직장 상사보다 더 높은, ‘고객’이란 또 다른 상사를 항상 모셔야 한다. 하루의 행불행은 그날의 첫 고객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장모(39) 씨의 얘기다.
“그날의 기분은 첫 손님에 따라 결정돼요. 천상의 행복을 차지할 수도 있고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거죠. 대놓고 무시하는 손님을 맞게 되면 ‘내가 저 사람보다 뭐가 못났다고 이 꼴을 보고 있지?’라며 자괴감에 빠져요.”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시내 한 호텔 직원 7명이 모여 행복에 대해 벌인 그룹 집중토론에서도 ‘불량 고객’에 대해 가슴에 담아 뒀던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게 있어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손님 앞에서는 티 내지 말자….” “누가 봐도 테이블 근처에 가기 싫을 만큼 인격적으로 ‘아닌’ 분들이 있죠. 어쩌겠어요? 앞에서 환하게 웃고 돌아서면서 남몰래 한숨을 쉬는 거죠.” “어떤 손님은 아예 트집을 잡으려고 작정했는지 별의별 것을 다 요구해요.”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직장인들 사이에는 ‘이 일을 오래 하면 감정이 무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텔레마케팅을 하는 박모(36·여) 씨는 “감정 노동 종사자의 상당수가 초기 1, 2년을 버티지 못하고 관둔다. 5∼10년 근무하면 웬만한 고객의 ‘횡포’에도 끄떡없을 만큼 맷집이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고객이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고객이 직장 생활에 든든한 힘이 되는 경우도 많다.
하나은행 직원 김은영(35·여) 씨는 얼마 전 고객으로부터 작은 감동을 경험했다. 2층에서 1층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몇 명의 단골 고객이 찾아와 “안 보여 처음엔 걱정했잖아. 다른 데 가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라며 김 씨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줬다. 김 씨는 “몇 백만 원의 월급보다 더 값진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상품매장 매니저인 조정현(35·여) 씨는 “좋은 고객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엔도르핀”이라고 규정한다. 현재 그가 관리하고 있는 고객은 500여 명. 이 중 9명 정도는 피를 나눈 것처럼 허물없는 사이라고 한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고객이 있어요. 축 처져 있다가도 그분만 오면 생기가 솟아요. 같이 고객 응접실에서 커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가족 같다는 생각을 하죠. 그 고객은 해외여행 다녀올 때면 으레 제 선물도 챙겨 준다니까요.”
서울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이경란(38·여) 씨도 아픈 환자를 돌보고 있을 때 삶의 보람을 느낀다. “제 손길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이상 행복할 수가 없죠.”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스마일 우울증’ 어떻게 극복하나▼
“대놓고 상소리를 하는 고객을 상대해야 할 때…. 겉으로야 웃죠. 그러나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죠.”
텔레마케터 강모(32·여) 씨의 말이다. 강 씨의 말에는 고객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감정 노동’ 종사자들의 감정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를 ‘스마일 우울증’이라고 부른다.
일반 우울증과 달리 스마일 우울증은 감정이 고갈된 느낌이 더 강하다. 쉽게 말해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잘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불감증처럼 된다는 것. 때로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전문가들은 일과 자신을 분리하는 게 가장 좋은 대처법이라고 말한다. 가령 “나는 지금 연극을 하고 있어. 잠시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된 거지”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감정노동에 따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고객이 인신공격을 하거나 비아냥댈 때 스트레스는 더욱 커진다. 이럴 때는 현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며 긍정적인 해석을 하려고 노력하는 게 좋다. 예컨대 “저 고객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어 화를 낸 것이겠지. 나를 무시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로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혼잣말이 큰 도움이 된다. “이 상황에서 꼭 내가 화내야 할까? 그만큼 중요한 일인가?”라거나 “화내 봐야 나만 손해지. 그냥 무시하자”라며 코웃음을 치면 된다.
이도저도 안 되면 그냥 생각을 ‘중단’하는 것도 방법이다. 입 밖으로 소리를 지를 수 없기 때문에 속으로 ‘그만!’ 하고 소리를 지른 뒤 백지장처럼 그 고객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상처는 반복해서 건드릴수록 덧나는 법이다.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면 적극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이완 호흡’. 눈을 감고 3, 4회 정도 깊숙이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쉬도록 한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