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씨의 ‘내 마음의 무늬’의 절반쯤은 ‘나이듦에 대한 생각’을 쓴 것이다. 그는 “나이드신 어머님이 나날이 조그마해지셔서 증손자를 돌보시는 모습을 보면 생명의 둥그런 순환 고리를 연상하게 된다”고 썼다. 박영대 기자
중진 작가 오정희(59) 씨가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를 펴냈다. 1996년 작품집 ‘새’를 펴낸 후 10년 만에 펴낸 책이다.
4일 기자들과 만난 오 씨는 2004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장편 ‘목련꽃 피는 날’을 단 한 차례 연재해 놓고 중도에 접어버린 사연을 밝혔다. 이 연재는 ‘새’ 이후 침묵을 지켜오던 대표적 여성 작가가 8년 만에 내놓는 작품으로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었다.
“어느 날 뜰에 핀 목련을 보고 집을 나간 한 여인이 하루 동안에 거의 반세기에 걸친 지난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시공을 넘나들면서 쓰려고 했어요. 압축적인 문장으로 긴장의 밀도를 지키려고 했는데 (그게 흐트러져) 누구나 쓸 수 있는 소설이 돼 가려는 것 같았어요. 연재란 게 처음 앞부분이 어긋나면 안 되는데. 연재는 ‘슬슬 써 나가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슬슬’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고. 섬세함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게 내 기질인 것 같아요. (연재를 포기하면서) 너무 참담했고…인간 파산 선언하는 기분이었어요. 나쁜 짓이었지요.”
오 씨는 이번 산문집에서 “육필로 쓰고 컴퓨터는 마지막에 정서할 때나 사용한다”고 했지만 실제론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손가락 아플 때의 왠지 모를 만족감 같은 게 있었는데, 이젠 불필요하다는 느낌이에요. 수고(手稿)에 대한 신뢰는 괜한 자기최면이었던 게 아닌가. 변화의 두려움에 대한 방어였다고 할까. 지금은 컴퓨터를 더 많이 써요.” 그는 “그래서 ‘목련꽃 피는 날’의 원고지 1000장 분량 초고를 거의 다 썼고, 올 상반기쯤에 내볼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 마음의 무늬’는 2000년 이후 그가 써온 산문들을 간추려서 펴낸 책이다. 일상 속에 은폐된 적의(敵意)와 욕망들을 대결하듯 응시해온 작가의 내면을 양말처럼 뒤집어 보인 글들이 많다. 어떤 대목은 ‘문장으로 사고하는 중독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듯해 좀 섬뜩할 때가 있다. “여러 해 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시신을 붙들고 울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 그의 눈은 닫히고 입은 열렸다. 꺼멓게 열린, 무정형의 욕망이 빠져나간(…)’” 같은 대목이다.
그러나 사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비의(秘意)에 싸인 문장과는 다른 사람이다. 좀 푼수 같은 면이 있다”고 말한다. 이번 산문집을 보면 그런 모습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이런 내용이다. “얼마 전에 화장품 회사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어떤 걸 쓰고 계십니까?’(사장) ‘(제가 뭘) 제대로 쓰기나 하나요.’(오정희) ‘그래도 열심히 쓰셔야죠.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 얼마만큼 관심 갖고 쓰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사장) ‘그러게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오정희) ‘이거 부지런히 쓰세요. 봄철에 방심하면 피부가 엉망이 됩니다.’(사장)”
오 씨는 이렇게 말했다. “‘푼수’란 말 뭐 노상 듣는 말이에요. 정말 소설 주인공처럼 살려면 가정 생활하는 제가 살아갈 수가 없어요. 나는 (세상과의) 화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생물로서의 한살이를 끝낸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가정에 대한 의무에서마저 자유로워진 게 아닌가. 정말 홀가분해요. (이번 책은) 소설 쓰기에 대해서 썼어요.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에요.”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