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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詩? 나도 쓰겠다” 귀여니 시집 비난봇물

입력 | 2006-01-05 16:02:00

▲ 귀여니시집 의 표지


사랑의 주특기는 행복을 미끼로 꼬드기다/ 안심해 모든 걸 내줬을 때 뒤통수 후려치기(제목: 사랑의 주특기)

내 심장은 병신이다/ 그래서 한 사람밖에 사랑할 줄 모른다(제목: 내 심장은)

그땐 미안했다고/ 지금 깨달았다고/ 제발 받아달라고/ 정말 잘하겠다고/ 천만에/ 이젠 네가 아플 차례야(천만에)

최근 시집 ‘아프리카’를 내고 시인 선언을 한 신세대 작가 귀여니(20·여·본명 이윤세)가 누리꾼들에게 집중 난타당하고 있다.

2003년 17세의 나이에 인터넷 소설 ‘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를 차례로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귀여니.

지난 2년간 그의 소설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타이완, 태국 등지로 날개 돋친 듯 팔려갔다. 송승헌, 강동원 등 당대 배우들이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작품성을 문제 삼는 여론도 일부 제기됐으나 상업적 성공 앞에 잠재워졌고, 귀여니는 자신의 성과를 발판삼아 성균관대에 특례 입학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귀여니에게 이른바 ‘검증’의 시간이 도래한 것일까.

‘아프리카’에 실린 귀여니의 시 몇 작품이 인터넷에 떠돌았고,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이것도 시냐?”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귀여니의 시는 문학계의 수치”라며 출판사에 항의 했다. 또 ‘이 정도는 나도 쓴다’며 경쟁적으로 귀여니를 조롱하는 패러디 시들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귀여니를 다룬 기사마다 비아냥 댓글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일각에선 이런 현상을 두고 댄스그룹 HOT 출신 ‘문희준의 락커 선언’ 이후 최고로 거대한 안티 물결이라는 평까지 나올 정도다.

당사자인 귀여니는 현재 큰 충격을 받고 출판사와도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다.

▽출판사 홈페이지 비난 글로 몸살▽

“귀여니양/ 홈피에다/ 낙서처럼/ 올린글줄/ 그걸 모아/ 책을 찍어/ 시집이라/ 기가차오/ 라면 끓여/배 곪으며/ 시 쓰시는/ 문학가들/ 한줄 시를/ 쓰기위해/ 줄담배로/ 고뇌하오/ 문학하는/ 예술인들/ 피눈물로/ 통곡하오/ 그러고도/ 출판사요/ 그건 그냥/ 책장사요?”

귀여니 시집 ‘아프리카’를 출간한 ‘반디출판사’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누리꾼의 비난 자작시다. 5일 현재 반디출판사의 홈페이지는 “시가 장난인가”, “함량 미달의 시집 출판으로 전체 문학계의 수준을 하락시켰다”는 수백 건의 비난 글로 홍역을 치루고 있다.

특히 국문학도라는 누리꾼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한 누리꾼은 “시 한편을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우는 문학가들을 생각해 보았는가”라며 “시집 ‘아프리카’를 읽으며 미래를 걱정해야 하다니,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진다”고 말했다.

심지어 지난달 30일부터는 귀여니 시집은 물론 반디출판사의 서적에 대한 온라인 불매운동까지 벌어졌다. 귀여니의 미니홈피에도 하루 평균 2000명 이상이 방문해 항의 글을 남기면서 대부분의 메뉴는 폐쇄됐다.

하지만 귀여니를 옹호하는 글도 간혹 눈에 띈다.

‘워려겐’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일흔의 촌부가 고된 농사일 중에 읊은 노래도 시가 될 수 있고, 열다섯 사춘기 소녀의 사랑고백도 마찬가지다”며 “누군가의 작품세계를 싸잡아서 비난하고 출판을 했다는 이유로 출판사까지 욕하는 누리꾼들의 행태는 과연 옳은 것이냐”고 반문했다.

▽ 인터넷 소설가의 첫 시에 패러디 열풍 ▽

포털사이트에는 귀여니의 시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패러디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얘도 내고/ 쟤도 내고/ 그럼 나도/ 시집 낸다(제목:시 쓰는 게 제일 쉬웠어요)
길게 쓰면/ 소설/ 짧게 쓰면/시 (제목:귀여니)
우리나라/ 좋은 나라/ 대한국민/ 모두시인(제목:좋은 나라)

△ 귀여니의/ 처음시집/ 아프리카/ 검증하자 (제목: 동네수첩)
귀여니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원천기술이 있는지/ 검증하여/ 무엇하랴? (제목:대박)
황박사는 가고/ 귀여니가 온다(제목: 대세)

△ 유장관이/ 말이 되나/ 시켜보자/ 우기면 돼(제목:청와대)
모든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제목:야당의원의 마음)

▽15일 팬사인회 앞둔 귀여니, 출판사와 연락 끊고…▽

이 처럼 인터넷에서 비난이 거세지자 반디출판사 편집장은 “논란을 일으켜서 죄송하다”며 “나름대로 좋은 책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런 사건이 터져 전 직원들이 괴로워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회사 내부에서도 시집으로 분류하는 것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며 “물론 정통 시인들의 시집은 아니지만 젊은 세대들만의 사랑 표현을 그대로 옮긴 ‘아포리즘 시집’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귀여니도 충격이 큰 듯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출판사의 귀여니 담당자는 “인신공격과 협박성 글이 이어지자 나이어린 작가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다”며 “우리도 작가와 연락하기 힘들다”고 안타까워 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15일로 예정된 귀여니의 아프리카 팬 사인회가 제대로 성사될지 모르겠다”며 “귀여니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시집 독자들은 ‘아프리카’에 별 관심이 없다. 판매 실적도 귀여니의 전작 소설에 비해 떨어진다”면서 “보통 시집의 경우 작가마다 일 년에 한권 내기도 힘들 정도로 시장이 좁다”고 덧붙였다.

▽“젊은 작가로서 삶의 진지함부터 배워야” ▽

이 같은 귀여니 사태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동안 귀여니의 글이 청소년의 감정적 배설욕구를 충족시켜 인기를 끌었지만, 이번 시집은 기존의 문학 형식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나 반발을 사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출판평론가 오석균 씨는 “‘시는 이런 것’이라는 식으로 구분할 근거는 없으나, 귀여니의 시는 표현이 피상적이고 서툰 게 사실”이라며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상업성에 휩쓸리고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이 담아내는 삶에 대한 진지함부터 배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누리꾼들의 불매 운동에 대해선 “옳은 일이라고 쉽게 판단내리긴 어렵지만, 문학의 본령을 지키기 위해 독자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나선 것은 일단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김수연 동아닷컴 기자 s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