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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입력 | 2006-01-06 03:03:00

그림 박순철


“그렇다면 후공(侯公)을 불러들여라.”

한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그렇게 명을 내리자 곁에 있던 군사들이 달려가 후공을 찾아왔다. 후공이 비쩍 마른 몸에 후줄근한 차림으로 불려오자 한왕이 더욱 탐탁지 않아 하는 눈길로 내려다보며 따지듯 물었다.

“과인이 듣자 하니, 공(公)은 지난번 육고(陸賈)가 항왕에게 사자로 가려고 우리 진중을 떠날 때 이미 일이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여럿 앞에서 잘라 말한 적이 있다고 했소. 그 까닭이 무엇이오?”

후공이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 검고 깊은 눈길로 한왕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주고받을 것이 있는 두 진중(陣中)을 오가며 사자 노릇을 하는 것은 사고팔 물건이 있는 두 물주(物主) 사이를 오가며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거간과 같습니다. 주고받을 것에는 반드시 값이 있기 마련이며 수단 좋은 거간이 하는 일은 양쪽이 모두 흡족해하는 값을 찾아 서로에게 권하여 거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대왕께서 사고자 하신 것은 태공 내외분과 여(呂)왕후였고, 그 두 기화(奇貨)를 군중에 가두고 있는 항왕은 진작부터 높은 값을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덜 떨어진 선비 육고는 대왕께서 치르실 수 있는 값도 물어보지 않고 실속 없이 요란하기만 한 유가(儒家)의 인의효제(仁義孝悌)만 떠들썩하게 앞세우고 갔습니다. 곧 치러야 할 값도 알지 못하면서 귀한 물건을 거간하러 간 셈이니 어찌 그 거래가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한왕도 포의(布衣) 시절에 장터 바닥을 오래 헤맸으나 사사롭게는 부모와 처자의 생사가 걸린 일이요, 크게는 천하의 형세가 걸린 일을 후공이 오직 거간이 물건 사고파는 일에 비해 말하자 적지 아니 기분이 상했다. 애써 성난 기색을 감추고 다시 후공에게 무슨 다짐이라도 받듯이 물었다.

“그럼 공이라면 그 거간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대왕께서 넉넉한 값만 치르시겠다면 반드시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한왕의 심사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후공이 한결같은 말투로 받았다. 그 음침하리만치 어둡고 표정 없는 얼굴에 더욱 심사가 뒤틀린 한왕이 한층 거칠게 물었다.

“그럼 공은 과인이 얼마를 주면 과인의 부모님과 한(漢) 초(楚) 두 나라의 화평을 항왕에게서 사 올 수 있겠는가?”

“홍구(鴻溝) 이동(以東)의 땅을 주십시오. 대왕께서 그 땅을 항왕께 값으로 내놓으시겠다면 이 거래를 성사시켜 보겠습니다.”

후공이 이번에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한왕이 문득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후공을 보며 물었다.

“홍구 이동이라고? 그 땅이 어떻게 되는가?”

“홍구는 형양 동쪽 20리 되는 곳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져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로 들어가는 사람이 만든 물길(溝渠)입니다. 대량성(大梁城)을 가운데 두고 남북 둘로 나뉘는데 그 북쪽은 시황제가 판 것으로 하수(河水)의 물을 끌어들여 대량에 물을 대는 홍구(洪溝)이고, 남쪽은 동쪽으로 이어지다 양무현(陽武縣) 남쪽에서 관도수(官渡水)가 됩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