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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기타]발 닿으니 풍경이요 손 닿으니 인정일세

입력 | 2006-01-07 03:02:00

지진해일(쓰나미) 피해가 컸던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를 올해 초 방문한 박완서 씨와 현지의 아이들.사진 제공 실천문학사


◇잃어버린 여행가방/박완서 지음/253쪽·9800원·실천문학사

원로 작가 박완서(75) 씨의 기행산문을 모은 책이다. 하회마을과 섬진강 오대산 같은 나라 안 풍정을 담은 글, 에티오피아처럼 기아와 재해의 땅을 다녀온 뒤 쓴 글, 중국과 바티칸 쪽으로 갔다 온 뒤 쓴 글들이 있다.

글로써 그림을 그려내듯 선연히 재현해 보이는 여행지의 잔잔한 풍경들, 소박한 곳으로 찾아가서 위로 받고 오는 따스한 관조, 찬란한 문명 뒤에 숨겨진 허황됨을 직진의 눈길로 응시하는 성찰의 힘이 빛나는 글들이다. 이 같은 산문의 밑바탕에는 인생은 뭔가 축적하기보다 성장해 가는 여로와 같다는 믿음, 사람은 근원적으로 선하며, 자연은 문명 위에서 조화롭다는 생각이 배어 있다.

박 씨는 눈에 익은 우리 땅부터 ‘생각하면 그리운 땅’이라며 살갑게 여긴다. 전라도를 찾아가서 쓴 한 대목은 이렇다. “산마다 넓게 또는 수줍게 치맛자락을 펴서 평야를 거느리고 있지 않은 산이 없었다. 어찌 이다지도 보기 좋을까. 평범한 시골이 마치 신이 정성을 다해 꾸민 정원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중국 옌볜 기행문인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는 박 씨가 실명으로 나오는 드라마 같다. 작가 송우혜, 사학자 이이화 씨와 함께 우리 독립군이 활약했던 곳들을 찾아보다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예기치도 않게 울게 됐다는 이야기인데, 여행지의 푸근한 인심에 감격해서 옛 기억을 되살려 내는 박 씨의 습관 같은 회상이 이상하게 따스하게 읽힌다.

“저런 배웅, 저런 인심은 실로 얼마 만인가? 어릴 적 방학 때 고향집에서 올라올 적의 개성역 생각이 났다. (…) 차창 밖에 붙어 작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차창 안의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나는 그이들 중에서 우리 할머니를 찾아내면 차창에 코가 납작해지도록 얼굴을 붙이고는 울먹해지곤 했었다.”

박 씨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에티오피아를 찾은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아이들을 보고 몇 차례 놀란 것을 적어 놓았는데 우선 너무도 피골이 상접했다는 것, 아이들의 용모가 상상 밖으로 뛰어나다는 것, 절대 구걸이나 읍소하지 않고 다만 웃는다는 것이었다. “뼈에 가죽만 입혀 놓은 것 같은 어린이를 살짝 만져보았더니 큰 눈을 반짝 뜨면서 나를 보고 활짝 웃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타이틀 산문 ‘잃어버린 여행가방’은 속옷가지들이 든 여행가방을 항공사의 실수로 잃어버린 뒤에 쓴 글인데 누군가 그 가방을 손에 넣게 되어 열어봤을 것을 생각하며 수치감으로 괴로워하던 박 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장수의 복은 충분히 누렸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고 살던 집과 가재를 고스란히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 가방이 아닐까.” “내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