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사는 20대 커리어 우먼 앨리스는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아직 싱글입니다. 그녀는 어느 날 저녁식사를 위해 냉장고에 있던 통조림 수프(사진)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우다 문득 심난해집니다. 부엌에 혼자 앉아 인스턴트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는 자신이 좀 한심스레 여겨진 게지요. 그녀는 문득, 외로움을 느낍니다. ‘아! 이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보살펴 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누군가’는 이 성가시고 지겨운 일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줄 테니까 말이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며칠 전 미술관에서 보았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작품에 왜 그렇게 마음이 끌렸는지 깨닫습니다. 워홀은 지겨운 일상을 뭔가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니까요.
앨리스는 스위스의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 ‘우리는 사랑인가’에 나오는 여주인공입니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과정을 수술을 집도하는 내과의사처럼 섬세하게 묘사한 이 책에서 제가 줄거리와는 상관없는 한 대목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자가 이 여주인공의 입을 통해 현대미술의 정수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무의미한 것들의 유의미화’입니다.
예술가들 중에는 과학자의 획기적인 발명처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미술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워홀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예술로 만들어 예술이란, 교양 있고 품위 있는 계층만이 향유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순 사람입니다.
워홀은 바로 앨리스가 먹었던 인스턴트 수프 통조림 깡통을 대량으로 실크 스크린해 예술로 둔갑시킵니다. 그의 상상력 하나로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깡통 용기는 미술관 벽에 걸리고 액자에 담겨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팔리는, 예술의 반열로 격상되었습니다. 워홀 덕분에 수십 년간 표현의 제재가 되지 못하고 평범한 물건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것들을 미술 평론가들도 찬찬히 살피게 되었습니다. 깡통 햄버거 헤어드라이어 립스틱 샤워기 전기스위치들이 성모나 수태고지를 다룬 작품들과 함께 미학적인 영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국제갤러리에서 있었던 영국 커플 작가 팀 노블 & 수 웹스터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길거리 쓰레기통에서 주운 생수병, 찌그러진 깡통, 남들이 쓰다버린 각종 일상용품들을 재미있게 붙여서 조명을 비춰 예쁜 동물 그림자로 탈바꿈시킵니다. 이들은 또 전시를 위해 세계를 돌아다닐 때 자신들이 묵은 호텔방 안에 있는 연필로 자신들의 일상 중 하나인 섹스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드로잉 연작을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상은 지루하고 무료합니다. 하지만 이 허섭쓰레기 같은 일상이 미학이 되고 문학이 된다고 생각하면 삶의 우울이 덜어지지 않을까요? 우울이 덜어지면, 삶이 새롭게 보입니다. 미술이 어렵다고요? 예술가들이 하는 일과 우리가 일상의 사소한 일에 감탄하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의 말처럼 ‘그 혹은 그녀에게 당신의 어디어디가 예쁘다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 깡통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일 테니까 말이지요.
허문영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