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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90년 ‘세계는 넓고…’ 100만부 돌파

입력 | 2006-01-09 03:02:00


“다른 사람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기만 잘살겠다고 날뛰는 데에 우리 사회의 문제가 있다. 이웃의 입장을 조금만 생각한다면 감히 식품에다 해로운 물질을 넣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초 ‘재벌 총수의 감동적 고백’이라는 평을 받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1989년 8월 10일 김우중(金宇中)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출간했던 이 에세이집은 이듬해 1월 9일 약 5개월 만에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다. 당시로선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록이었다.

초판 2만 부가 단 하루 만에 매진되며 ‘김우중 신드롬’까지 불러온 이 책은 1999년 대우그룹 워크아웃 전까지 10년 동안 총 144쇄가 인쇄된 ‘스테디셀러’이기도 했다.

‘내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란 부제와 함께 기업 경영 체험과 교훈이 담긴 30여 편의 글로 구성된 이 책은 젊은이의 투지로 시작해 재벌그룹을 이룬 기업인의 육성이 진솔하게 담겼다는 점에서 직업과 나이를 초월해 광범위한 독자를 모았다.

책이 발간된 뒤 저자와 출판사 측에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편지가 쏟아졌다. 그 가운데는 ‘아이들에게 교훈적인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차에 자식을 가르치는 좋은 교재로 쓰고 있다’는 사연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김 회장’은 책의 내용과 사뭇 달랐다. 그가 1999년 경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총수 자리에서 물러난 뒤 대우그룹은 분식회계를 비롯한 부실 경영으로 해체됐다. 그 자신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의 ‘적색수배자’가 돼 5년 8개월여 동안 해외도피 생활을 했으며 지난해 6월 귀국한 후 곧바로 구속 수감됐다.

말단 샐러리맨에서 굴지의 재벌 총수로, 다시 수배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김우중. 그는 책을 통해 말했다.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한 승부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깨끗하고 떳떳하게 싸우는 것이다.’

그는 또 말했다. ‘말과 실천이 일치해야 한다. 말만 청산유수처럼 늘어놓을 뿐, 그 말들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지난해 8월 29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12월 19일 입원 중인 병실에서 쓸쓸하게 고희(古稀)를 맞은 그가 지금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