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동안 생겨난 수많은 종교 가운데 사유재산과 가족을 반대한 종교가 많았다. 이들 종교는 대부분 다 죽었다. 오직 사유재산과 가족을 지지하는 종교만이 살아남았다.
오만한 이성과 원시인의 본능이 결합된 결과가 사회주의 도덕이다. 이런 도덕을 따른다면 현 인류의 많은 부분은 파괴되고 그 나머지도 처참한 빈곤이 지배한다.―본문 중에서》
인간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믿음이 하나 있다. 정부는 이상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완전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정부가 나서서 경제사회를 계획하고 조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서 생겨난 것이 사회주의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뒤엎고 인간사회에 대한 설계의 불가능성을 끈질기게 주장한 책이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의 ‘치명적 자만’이다. 이 책의 내용은 경제학을 넘어서 학제적이다. 윤리학으로서도, 역사학과 인류학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돋보이고 믿음직스럽다.
하이에크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렇다. 정부가 이상사회를 디자인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정부는 풍요와 번영의 원천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국의 유명한 ‘이코노미스트’지(誌)가 격찬했듯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자유의 대변자’ 하이에크의 대답은 간단하지만 심오하다. 그것은 두 가지이다. 경제사회를 원하는 대로 디자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갖는 것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하나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나서서 이상사회를 설계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정직하지 못한 정치적 선동가의 지적 자만(自慢)이다. 이런 자만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빈곤과 폭정, 그리고 도덕의 파괴와 문명의 파괴가 그것이다. 구소련권의 사회주의 몰락이 이를 또렷하게 입증한다.
하이에크의 두 번째 대답은 정부의 계획과 규제가 없는 자유시장만이 번영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는 성장과 번영의 기반이 되는 방대한 지식을 창출하고 유통하는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본능에 기초한 원시사회의 야만적 삶을 극복하게 하고 문명된 삶을 가능하게 한 것, 이것이 시장경제다. 시장경제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라’는 성경 ‘창세기’의 가르침의 실현이라는 주장은 그의 저서의 클라이맥스다.
더 나아가 시장경제와 수많은 법과 도덕은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적 소산도 아니고 정부나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시행과 착오를 거쳐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그의 진화사상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하이에크의 저서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는 정부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야 성장과 분배도 개선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한국경제는 정부의 계획과 규제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 교육제도와 복지제도는 사회주의의 전형이다.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악성 규제도 말이 아니다. 정부의 치명적 자만이 도처에 지배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미래는 그래서 위태롭다.
민경국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