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시나리오가 최근 소설로 출간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온라인 게임 로한(왼쪽)과 데카론도 소설로 나와 호응을 얻고 있다. 사진 제공 써니YNK·게임하이
《여가 시간에 게임을 즐겨 하던 박기범(27·회사원) 씨. 한동안 책에서 멀어졌던 그가 요즘 다시 독서에 몰두하고 있다. 평소 즐기던 게임이 책으로 나왔기 때문. 박 씨는 “각 게임 사이트에 연재되는 관련 소설과 단행본으로 나온 게임 소설을 챙겨 본다”며 “문자로 된 소설은 상상력을 더 많이 자극하기 때문에 모니터 속 현란한 영상 이미지가 주는 재미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 게임을 읽는다?
‘로한’ ‘데카론’ 등 인기 인터넷 게임이 최근 단행본 소설로 발간됐다. ‘리니지2’ ‘구룡쟁패’ 등 일부 온라인 게임은 홈페이지에 ‘소설’로 연재된다. ‘21세기 디지털 문학’으로 인정받는 게임의, 문학으로서의 서사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 그간 ‘반지의 제왕’ ‘드래곤라자’ 등 영화 시나리오나 소설이 게임으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게임이 문학으로 역전되는 현상은 드물었다.
‘로한’의 제작사 써니YNK의 최정훈 게임사업본부장은 “게임 제작 초기부터 탄탄한 세계관을 가진 스토리를 구성해 게임과 소설을 함께 제작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게임의 소설화’가 이뤄졌다. 미국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인기 게임 ‘워 크래프트’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등은 일찍이 소설로 만들어져 한국에서도 2000년대 초부터 번역 출간됐다.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나오키 상 수상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 씨의 인기 소설 ‘이코-안개의 성’(2004년) 역시 게임 ‘이코’를 소설화한 것이다.
정경란 이화여대 디지털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는 “이전 문학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내러티브가 종결된다면 게임은 그 안에 이야기의 재료만 있고 나머지는 이용자가 만들어 가기 때문에 무수한 이야기 생산이 가능하다”며 “그중 하나만 고정된 이야기로 만들어도 장편소설이 될 정도로 게임의 서사적 가치는 뛰어나다”고 말했다.
○ 21세기 문학 ‘게임 시나리오’
게임 시나리오가 힘을 가지게 된 원인은 게임산업의 거대화 때문. ‘2005 대한민국 게임백서’(한국게임산업개발원)에 따르면 국내 게임시장 규모는 4조3156억 원이며 이 중 온라인 게임의 매출은 1조186억 원이다. ‘판’이 커지다 보니 탄탄하고 좋은 시나리오가 게임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
‘구룡쟁패’의 박기순 기획팀장은 “산업이 커지면서 게임 시나리오 기획에 전문 소설가나 방송작가를 배치하는 경우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인기 온라인 게임의 흥행 승패가 그래픽이나 오락성 못지않게 게임 시나리오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 온라인 무협게임 ‘구룡쟁패’ ‘영웅 온라인’의 시나리오 작업에는 실제 무협소설 작가들이 참여했다. ‘리니지2’는 5명의 고정 작가를 포함해 업데이트 할 때마다 10명 이상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의 시나리오와 게임 시나리오가 갖는 차이는 △개인의 창작이 아닌 집단 창작 △기존의 소설, 영화가 순차적 기승전결로 전개되는 시퀀스(Sequence) 형이라면 게임 시나리오는 기승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참여자에 의해 반복되는 루프(loop) 형 △게임 참여자가 스토리에 직접 개입해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 등이다.
소설가 이인화(40) 씨는 “과거 문학이 작가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었다면 21세기 문학인 게임은 직접 민주주의가 문학에서 실현되는 방식, 즉 수십만 명이 쓰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