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날라리 압구정족(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순정만화 주인공 재벌 2세(드라마 ‘천국의 계단’), 배에 왕(王)자를 새기며 근육질 몸매로 쌍절곤을 휘두르던(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얼짱 몸짱 권상우(사진). 그러나 그런 권상우는 이제 더는 없다.
영화 ‘야수’(12일 개봉)에서 오히려 그의 얼굴과 몸은 처절하게 부서진다. 성내고 소리 지르는 그의 몸은 거친 들개 같다. 그리고 마침내 기관단총 세례를 받으며 속절없이 부서진다.
‘귀한 몸을 저렇게 함부로 굴려도 되는 건가, 그래도 멋있다!’는 생각이 오가는 순간 기자는 그의 ‘연기’가 아니라 ‘몸’에 몰입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심어진 권상우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얼마나 깊은지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미안함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제 한국 영화계는 명실상부한 연기파 배우를 또 한 명 얻게 되었음을 인정해도 될 것 같았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권상우는 ‘야수’가 아닌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푹 눌러쓴 모자에 긴 코트를 입고 명랑하면서도 툭툭 내던지듯 하는 말투는 진지함과 장난기를 오갔다. 피부는 여전히 고왔지만, 눈자위에는 피곤이 묻어 있었다.
―(영화에서) 그렇게 몸을 던졌으니 진이 빠질 만도 하겠다.
“기력이 다 떨어질 정도다.(웃음)…. (영화) 다 찍고 울었던 건 이번이 두 번째다. ‘말죽거리…’ 때 마지막 옥상 장면을 찍고 펑펑 울었다. 이번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너무 뿌듯해 눈물이 나왔다. 작업하는 내내 행복했고 끝나고 나서도 해냈다는 성취감이 밀려왔다. ”
―차에서 뛰어내리고 질주하는 차 위를 날아다니는 모든 역을 대역 없이 했다는데….
“원래 겁이 좀 없다. 운동을 많이 해 기본적인 낙법은 할 줄 아는데 이게 도움이 많이 됐다. 그래도 멍들고 삐고 늘어나고, 온몸이 성할 날이 없을 정도로 촬영 내내 병원 신세를 졌다.”
―욕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고, 조그만 자극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성에 안 차면 사람을 패는 형사 장도영의 캐릭터가 자연스럽다. 본인과 닮았나.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장난기’ 버전으로 마음을 먹었다는 듯) 비슷하다.(툭 내뱉더니 하하 웃었다) 장도영은 남자들의 일반적인 캐릭터다. 다만 감춰진 내면을 숨기지 않고 내지른다는 점에서 순수한 사람이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강하면서도 약한 남자다.”
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을 물었더니, “어머니(이주실)나 애인(엄지원)과 대화했던 부분”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준 성취와 허무가 엇갈린 표정 연기라고 할 줄 알았는데”라고 되물었다.
“물론 그 장면 역시 기억에 남는다. 쟁취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이중적인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건 뒷얘기지만, 마지막 장면은 탄환 50발을 가슴에 심고 찍었다.(영화에선 원격조종으로 터뜨린다고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보다도 많을 것이다. 흥행기록은 어떨지 모르지만, 탄환 기록은 깰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생의 정점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젊은 서른을 갓 넘긴 이 청년은 영화 ‘야수’를 통해 진짜 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아무리 잘해도 칭찬에 인색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배우는 아니다’고 했던 사람들의 시선에 이제 더는 개의치 않을 만큼 그의 내면은 훨씬 강해진 듯 보였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