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엘리트다. 그러나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반(反)권력’이다.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담론(談論)을 생산하고 주도하는 지식인그룹의 특징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성역화를 도모하는 ‘지식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다.
예전의 담론그룹들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같은 계간지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사회연구회’(현 한국산업사회학회)나 ‘학현연구실’(현 서울사회경제연구소) 등도 담론그룹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뤄지고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 담론그룹의 역할은 축소됐다. 환경, 여성, 인권 등으로 의제 설정이 세분되고 다원화된 데다 담론 생산이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진지전 형태를 요구하게 된 점도 한몫했다.
최근 학계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담론그룹이 생겨나고 있다. 주류 학계의 중심부에서 의식혁명을 외치는 뉴라이트 지식인, 금기였던 민족과 민중에 대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제도권 밖에서 전복적 지식운동을 펼치고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권력의 우군으로 득세한 좌파이념에 맞서고(뉴라이트), 역사청산론의 허실을 짚어보고(비교역사문화연구소), 경직되고 세속화된 제도권 지식 권력의 타성에 도전하면서(수유+너머) 우리 사회의 담론을 창출하는 새로운 지식인그룹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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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포럼…“국가 정체성 흔드는 민중사관 수정”
뉴라이트 계열의 지식인들이 포진한 핵심 담론그룹으로 ‘교과서포럼’을 들 수 있다.
지난해 1월 출범한 교과서포럼은 4차례 포럼을 통해 중고교 역사·사회 교과서가 감상적 민중사관에 젖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참여 인사 대부분이 중진학자로 언론에 활발하게 기고해 온 저명한 칼럼니스트들이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서울대 박효종(정치학) 이영훈(경제학) 전상인(사회학) 교수, 성신여대 김영호(정치외교학) 교수, 성균관대 김일영(정치학) 교수, 명지대 강규형(역사학) 교수, 충남대 차상철(역사학) 교수와 서강대 신지호(정치학) 겸임교수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뉴라이트 싱크넷’과 ‘뉴라이트 네트워크’의 핵심 인사다. 이영훈 김일영 교수는 1980년대를 풍미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류의 수정사관이 낳은 오류를 바로잡겠다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편집자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현 집권세력이 냉철한 현실인식 없이 공허한 도덕론과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는 반지성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맹렬히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파토스(정념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권력과 대결하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냉철한 현실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이면서 엄밀한 객관성을 추구하는 실증주의자다. 상당수는 과거 열렬한 ‘운동권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영훈 교수는 위장 취업해 현장 노동운동을 했던 골수 운동권이었다. 김영호 교수는 1980년대 이념서적 출판사였던 녹두출판사 대표를 지냈고 김일영 교수 역시 1980년대 운동권 담론의 생산기지였던 산업사회연구회 초기 멤버였다.
박효종 교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이를 지식인 사회의 담론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 전체의 공론으로 제기할 필요성에 공감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비교역사문화硏…‘민족-민중 신화 벗기기’ 금기 도전
뉴라이트그룹과 다른 방향에서 한국사회의 성역으로 남아 있는 민족과 민중의 신화를 벗겨 내는 담론그룹이 있다. 임지현(역사학) 교수가 소장을 맡고 있는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다.
임 교수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도발적 구호 아래 월드컵 응원전과 촛불시위로 정점에 이른 한국 민족주의가 일종의 신화이자 허구라고 주장하는 탈(脫)민족주의 담론을 선도해 왔다. 또 박정희 시대의 독재가 대중의 암묵적 동의와 지지로 가능했다는 ‘대중독재론’을 통해 독재에 대한 저항의 주역으로 자리 매김 되던 민중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임 교수의 이런 문제의식을 심화 발전시키기 위해 2004년 다양한 전공의 인문학 연구자들이 모여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한양대 피종호(독문학) 김성제(영문학) 박찬승(역사학) 교수, 부산교육대 전진성(역사학) 교수, 건국대 권형진(역사학) 교수와 프랑스 파시즘을 연구한 ‘호모 파시스투스’의 저자 김용우(역사학) 전임연구원, 식민지강점기 파시즘을 연구한 ‘역사적 파시즘’의 저자 권명아(국문학) 전임연구원 등이다.
이들은 정교 분리와 탈주술화를 선언한 근대가 대중독재와 민족주의를 통해 어떻게 정치를 종교화하고 주술화했는지를 보여 주는 공동 연구물을 벌써 4권 출간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에토스(민족적 사회적 관습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신화에 도전하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 청산’이 필요하다는 역사청산론에 대한 강력한 대항담론도 만들고 있다. 역사의 교훈은 특정 이념 또는 헤게모니에 의해 청산되는 방식이 아니라 그런 역학관계까지 포함하는 입체적이고 중층적 기억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기억의 정치학’이 그것이다.
임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기의 부역자를 색출하라는 의식에는 역사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소수에게 전가하고 다수의 대중은 면죄부를 얻겠다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며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직시하는 것만이 잘못된 권력 헤게모니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수유+너머…고전 재해석 통해 야성의 담론 구축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구성원들은 전복적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1997년 이후 서울 한복판에서 함께 생활하며 고전 강독과 세미나를 통해 학문을 연마하는 연구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박사와 예비 박사들이 주축이었으나 점차 석사과정, 학부 졸업생, 직장인, 전업주부로 확산되고 있다. 전공도 국문학 사회학 철학 중심에서 중문학 수학 역사학 여성학 교육학 종교학 산업디자인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베이징(北京), 일본 도쿄(東京), 미국 뉴욕주 코넬대가 있는 이서카에 지부가 생겼다. 연구모델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는 것.
‘수유+너머’ 고병권 대표는 “화석처럼 굳어진 개념의 뿌리를 고전 텍스트를 통해 새롭게 캐내는 계보학적 연구와 자신의 전공을 갖고 다른 전공 분야에 뛰어드는 ‘트랜스 연구(transdisciplinary)’를 통해 제도권 학문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적 담론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로고스(언어 이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권위에 도전하는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출판계에서 기획자 필자 번역자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책이 ‘니체-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노마디즘’ ‘현대사상총서’ 등 50권이 넘는다.
이들 속에 관류하는 담론은 현재까지는 ‘MN(마르크스+니체)주의’와 동아시아 근대성 연구로 요약된다. 서울대 사회학과 선후배인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와 고병권 대표는 마르크스레닌(ML)주의 대신에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니체의 철학비판을 접목한 MN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적 삶을 꿈꾼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