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한 아파트에 마련된 출판평론가 표정훈 씨(왼쪽) 집필실을 찾은 박중서(위) 김연수 씨. 표 씨는 “어쩌다 이렇게 책을 많이 모으게 됐는지 모르지만, 책장을 쓰다듬어 볼 때마다 흐뭇하다”고 말했다. 남양주=권기태 기자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란 책이 있다. 최근 뜨인돌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점잖은 광기’ 정도로 번역해 볼 수 있다. 책에 미쳐 온갖 책들을 모은 고금의 기괴한 ‘애서광(愛書狂)’들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고 감칠맛 나게 써놓은 책이다. 1111쪽(한글판)에 달하는 거의 ‘목침’에 가까운 이 두꺼운 책을 쓴 미국 저널리스트 니컬러스 바스베인스뿐만 아니라 이를 공동 번역한 소설가 김연수(36), 출판평론가 표정훈(37), 출판기획자 박중서(33) 씨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역시 애서광이라는 것이다. 특히 세 사람은 1만 권 이상 책을 모아온 이른바 ‘만 권 클럽’ 회원으로 분류된다.》
‘젠틀 매드니스’에는 미국 전역에서 희귀본 2만3600여 권을 훔쳐서 소장해온 희대의 책 도둑 스티븐 블룸버그, 자신의 회고록을 자기 살가죽으로 장정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강도 제임스 앨런의 회고록, 미국 재벌 J P 모건과 헨리 헌팅턴의 책 수집벽(癖) 등 기막힌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1995년 출간 후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책’으로 꼽았다. 2003년 표 씨가 한 칼럼에서 “왜 이 책이 번역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쓰자 두 사람이 선뜻 뛰어든 것도 이들 모두 심각한 ‘애서광’이기 때문이었다.
지난주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한 아파트에 있는 표 씨 집필실로 김, 박 씨가 함께 찾아갔다. 1만 권을 훨씬 넘는 책들이 난동을 부린 듯 온 집에 흩어져 있었다. “‘젠틀’은 어디가고 ‘매드니스’만 남았느냐”고 김 씨가 어이없어 했다. 표 씨는 “지난해 8월 겨우 집필실을 마련했는데, 분류가 아직 안 돼 바닥에 깔아놓고 있다”고 민망한 듯 말했다.
표 씨는 “집에서 배낭에 담아 한 달간 날랐다. 근육이 상당히 생기더라. 주민들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봐 쑥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사는 건, 그게 차지할 공간 마련 비용도 지불하겠다는 뜻이어서 좀 힘들다. 차라리 산뜻한 우표 수집 같은 데 미쳤어야 하는데”라고 덧붙였다.
독서에 빠져 면도하는 시간이 아까워 수염을 길렀다는 박 씨는 폭 넓은 특수서가를 주문해 책을 깊숙이 한 줄로 넣고, 그 뒤에 또 한 줄 넣게끔 했다고 한다. “안쪽의 책은 어떻게 찾느냐”고 물으니, 수염을 만지며 찰스 램의 말을 인용했다. “목자가 어찌 자기 양을 못 찾으리오.”
그의 주머니에는 작은 쪽지들이 있는데 ‘김현 3, 5+내쇼(연월) 0212, 0405, 그르니에 9 1+0, 3, 4’처럼 암호 같은 축약어가 쓰여 있다. “시리즈들 가운데 내가 못 모아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내도 책에 미쳐 부엌에까지 쌓아두는데 전혀 문제없다”며 든든해했다.
세 사람의 특징은 ‘돈 타령을 하지 않으며 헌책방을 집요하게 드나든다’는 점이다. 세 사람 다 책을 잘 구해 주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숨어있는 책’이란 헌책방의 단골들이다.
김 씨는 “‘동서추리문고’ ‘해문추리문고’ 시리즈는 누가 버린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여 들고 와 다 읽었다. 장편소설 ‘굳빠이 이상’을 쓸 때는 이상(李箱) 선집 소장가에게 찾아갔더니 ‘나는 새 선집이 있다’며 그냥 주더라”고 말했다.
박 씨는 “비주얼 문화의 기본은 책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자기 상상력이 줄어들더라.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고 원작을 보면 캐릭터 얼굴이 영화에서 본 것만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들은 “일본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작더라도 근사한 개인 도서관을 만들어놓고 실컷 책을 썼으면” 하고 입맛을 다셨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