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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모스크바 중심에 한민족이 모인다

입력 | 2006-01-13 03:02:00


12일 새벽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 겨울밤이 유난히 긴 북국의 도시답게 어둠과 적막에 싸인 시내에서 유독 요란한 기계음과 불빛이 분주히 움직이는 곳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 최대의 건설투자 프로젝트(4억 달러 규모)로 꼽히는 롯데플라자 건설 현장.

영하의 추위도 잊은 채 하루 24시간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올해 말 지상 21층, 지하 4층의 백화점과 비즈니스센터가, 2008년에 지상 9층의 호텔이 문을 열면 이곳은 한국 기업의 러시아 진출 교두보가 된다.

공사에 투입된 인력은 600여 명. 롯데건설 본사에서 나온 20여 명의 한국인 직원이 공사를 이끌고 있다. 또 다른 핵심인력은 10여 명의 재러 한인동포(고려인) 관리직원과 기술자이다. 현장인부 중 30여 명도 고려인이다.

공사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롯데건설 김용덕(金容德) 이사는 “러시아 엔지니어들은 한국 기업 문화에 쉽게 적응을 못해 떠나는 경우가 많지만 고려인 엔지니어들과는 호흡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건설 엔지니어인 이노켄티 김(55) 씨와 파벨 김(43) 씨는 10여 년 전부터 러시아에 진출한 유원건설과 삼성물산 건설부문 등 한국 건설업체에서 일해 온 베테랑들.

이들은 “처음에는 무모할 정도로 빠른 한국 기업의 일처리에 당황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오히려 러시아식의 느림이 답답할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최근 다시 모스크바 등 러시아로 몰려오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5일 국적법 개정안에 서명했다. 새 법은 옛 소련 시민권자들의 러시아 국적 취득을 쉽게 만들었다. 인구감소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옛 소련 주민들의 이민을 받아들이려는 것. 이에 따라 앞으로 중앙아시아 거주 고려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게다가 최근 러시아로 진출하는 한국인이 많아졌다. 아직까지 모스크바에 사는 한국교민은 3500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앞으로 2∼3년에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70여 년 전 유라시아 땅에 먼저 발을 디딘 고려인과 1990년 한-소 수교 후 진출한 한국인이 러시아 땅에서 어울려 살게 된 것.

벌써부터 모스크바에 ‘카레이스키(한국) 타운’도 생겨났다. 모스크바 서남부 코시긴 거리에 있는 오를료녹(새끼독수리)호텔. 주변에 10여 개의 한식당과 상점, 한국인 전용 호텔, 한국 비디오테이프 대여점, 부동산중개업소, 미용실 등이 모여 있다.

모스크바의 한식당은 대부분 한국인이 운영한다. 하지만 주방에서 한국인 요리사를 돕는 사람은 조선족 아줌마들이고 손님을 맞는 종업원은 대부분 고려인이다. 한국어를 아는 조선족들은 러시아어에 서툰 한국인 요리사를 도울 수 있고, 러시아어를 아는 고려인 종업원이 현지 손님을 맞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한식당에서도 한민족끼리 분업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에는 극동의 건설현장과 벌목장에서 일하다가 탈출한 탈북자까지 살고 있다. 러시아와 북한 당국에 쫓기고 있는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한국인이 짓는 식당이나 사무실 건물 등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빛깔’의 한민족이 공존하면서 서로 간에 갈등도 생기고 있다. 핏줄은 같지만 살아온 배경이 다양하다보니 문화적 차이에서 때로는 오해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변대호(邊大豪) 주러 한국대사관 총영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 작년 모스크바조선족協 결성

“우리는 국적은 중국이고 생활 근거지는 러시아지만 핏줄만은 틀림없는 한민족입니다.”

지난해 10월 결성된 모스크바조선족협회의 김태수(金泰洙·44) 회장은 “동토의 땅에서 한국인 고려인과 함께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1980년대 말부터 ‘보따리 장사’로 옛 소련을 드나들기 시작했던 조선족들은 소련 붕괴 후 본격적으로 러시아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지금은 모스크바 주변에 2000여 명, 러시아 전역에는 수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와 중국이 최근 동맹관계를 강화하면서 서로 비자 발급 절차를 간소화해 중국 국적인 조선족들의 러시아 입국이 더 쉬워진 덕도 있다.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 출신의 김 회장은 “중국은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지만 조선족이 많이 사는 옌볜(延邊) 같은 지방은 아직 낙후돼 있고 인구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러시아로 많이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족들은 어차피 중국에서도 소수 민족인 만큼 어디를 가도 기댈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외국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미국에만도 벌써 2만여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0여 년 전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 맨손으로 황무지를 일궜던 것처럼 조선족들 역시 맨몸으로 낯선 러시아 대륙에 와서 강한 생활력으로 삶을 개척하고 있다.

모스크바 주변의 재래시장과 건설현장 식당 등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제법 기반을 잡은 상태. 최근 조선족이 운영하는 한식당까지 생겼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