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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의 두얼굴]따뜻한 ‘사랑의 가교’ vs냉정한 ‘원칙의 칼날’

입력 | 2006-01-16 03:05:00


《법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칼을 들고 있다. 공평무사(公平無私)를 상징하는 것이다. 눈을 가린 여신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의 법에는 때로 감정과 눈물이 있고, 그것이 더 좋은 법, 더 나은 정의가 될 수도 있다. 법을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찾은 사연과 법 앞에서 더 안타까워진 사연을 통해 법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사례1:법은 따뜻한 ‘사랑의 가교’

결혼을 전제로 한 남녀의 혼전 성관계는 굳이 흠이라고 할 수 없고, 어쩌면 흔한 일이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하고 관계를 맺은 남자가 등을 돌리면 ‘사랑’은 ‘범죄(혼인빙자간음)’로 바뀌고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지는 험악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법은 기다림과 배려로 ‘범죄’를 다시 ‘사랑’으로 되돌려 놓았다.

명문대 대학원생 A(26) 씨는 2003년 5월부터 5년 연상의 B(31·여) 씨와 사귀어 왔다. A 씨는 “꼭 결혼하자. 내가 책임지겠다”며 B 씨와 관계도 맺었다.

그러던 A 씨는 지난해 초 갑자기 변했다. “집안에서 반대한다”는 핑계로 B 씨를 멀리하더니 끝내 헤어지자는 말까지 했다. B 씨는 A 씨를 설득하다 지쳐 법에 호소했다.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A 씨를 검찰에 고소한 것.

지난해 4월 서울남부지검 검사실에서 고소를 당한 A 씨와 그를 고소한 B 씨가 마주했다. 담당 검사는 ‘법대로’ 처리하는 대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검사는 B 씨가 임신 7개월인 사실도 알게 됐다. 반면 A 씨 집안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고 그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A 씨의 말도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B 씨는 자신의 형편으로는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어 A 씨를 고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담당 검사는 이들이 진심으로 사귀어 오다가 집안의 반대와 임신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헤어지게 됐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A 씨를 기소하기에 앞서 ‘기회’를 줬다.

검사는 A 씨에게 “정말 B 씨와 결혼할 수 없는지 다시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헤어지더라도 태어나는 아이의 양육 책임이 있다는 점과 헤어질 경우 양육비는 어떻게 지급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동의해 혼인신고를 해야 고소도 취하될 수 있다고 알려주면서 한 달 뒤 다시 보자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검사는 세 사람을 함께 맞았다. A, B 씨가 그들의 아이와 함께 찾은 것이다. A 씨는 “그동안 집안 반대로 인한 갈등 때문에 이야기조차 제대로 못했었다”며 “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 덕에 대화를 하면서 오해를 풀고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봤다”며 “마음을 잡고 목회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B 씨는 고소 취하서를 제출했고 담당 검사는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대검찰청은 최근 ‘2005년 검찰의 따뜻한 사례’로 이 사건을 꼽아 공개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사례2:법은 냉정한 ‘원칙의 칼날

딸이 집에서 성폭행당하려는 상황을 목격하고 가해자인 아들의 친구를 때려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

지난해 12월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 법정에서는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된 A(46) 씨의 사연이 법정에 나온 방청객들을 안타깝게 했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A 씨는 지난해 6월 부인과 함께 일을 마치고 오전 3시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오전 8시쯤 일찍 잠에서 깬 A 씨는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방문을 열어 본 A 씨는 B(당시 17세) 군이 바지를 벗은 채 저항하는 딸 C(16) 양의 옷을 벗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A 씨는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치며 B 군을 방 밖으로 끌어내 주먹으로 B 군의 얼굴을 때렸다. B 군은 욕설을 하면서 A 씨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린 뒤 현관 쪽으로 도망쳤고 A 씨는 B 군을 다시 붙잡아 거실 쪽으로 세게 밀었다. 순간 B 군은 거실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혔다. B 군을 몇 차례 걷어차던 A 씨는 B 군이 정신을 잃은 것을 발견하고 119로 신고했다. 그러나 B 군은 이미 숨진 뒤였다.

B 군은 고등학생인 A 씨 아들의 학교 친구로 C 양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C 양은 전날 밤 술에 취해 찾아온 B 군을 오빠 방에서 재웠다. 오빠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C 양은 아침에 B 군을 깨우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가 일이 벌어졌다고 진술했다.

A 씨는 재판 과정 등에서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눈에서 피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판단을 잘못해 사고를 냈다”며 “나로 인해 다른 가족이 피해를 보게 돼 가슴이 아프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눈물을 흘렸다.

A 씨 가족은 B 군 부모를 여러 차례 만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지만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A 씨 가족은 전 재산을 정리해 1억 원을 법원에 공탁했다.

검찰은 A 씨를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했고 지난해 9월 1심 재판부는 A 씨에 대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6부는 “사건 범행 동기와 과정, 피고인의 반성 정도 등을 고려할 때 1심 형량이 적당하다”며 1심대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