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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방형남]‘코냑의 힘’

입력 | 2006-01-16 03:17:00


코냑(Cognac)은 프랑스 중서부 지방의 도시 이름이다. 거기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 증류주가 그 유명한 코냑이다. 레미 마르탱, 에네시, 쿠르부아지에, 마르텔, 카뮈 등 세계적 코냑 회사가 그곳에 몰려 있다. 근처에는 종작(Jonzac), 자르낙(Jarnac) 등 코냑처럼 지명이 ‘악(ac)’으로 끝나는 도시와 마을이 많다. 그곳 주민들도 코냑을 만든다. 거기서 생산된 술이 유명해졌더라면 오늘날 세계인들은 코냑이 아니라 ‘종작’ 또는 ‘자르낙’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비가 쏟아지던 8일, 코냑의 이웃 마을 자르낙에 수백 명의 외지인이 모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추모객들이 집결한 것이다. TV를 통해 묘소에 둘러선 유명 인사들을 보노라니 파리 특파원 시절 목도했던 풍경들이 코냑 향기처럼 아스라하게 피어오른다.

14년간 대통령을 지낸 미테랑의 묘소는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시신은 가족 묘지에 안치됐고, 묘비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달랑 ‘프랑수아 미테랑 1916∼1996’이라고만 새겨져 있었다.

요즘 프랑스에는 미테랑 열기가 뜨겁다고 한다. 리베라시옹지가 보도한 여론조사에서는 미테랑이 샤를 드골을 누르고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 중 최고로 꼽혔다. “미테랑은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한 철학자 자크 아탈리의 말에서 드러나듯 많은 프랑스인이 ‘과거의 힘과 명성’을 유지했던 미테랑 시절을 그리워한다. 미테랑의 ‘국민 통합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프랑스인도 많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미테랑의 능력이 설득력이다. 10주기 소식은 1992년 TV 공개토론을 생생히 떠올리게 한다.

미테랑은 유럽통합 조약인 마스트리히트조약 비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TV 공개토론에 도전했다. 토론은 3라운드로 진행됐다. 먼저, 토론 참여 신청자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 14명이 현직 대통령과 설전을 벌였다. 이어 저명한 언론인 3명이 공격자로 나섰다. 마지막에는 반대운동을 이끌던 필리프 세갱 하원의원과 미테랑이 일대일로 맞섰다. 만 75세의 늙은 대통령이 3시간 동안 18명의 상대와 벌인 공방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지도자의 철학, 정책, 신념, 지식, 리더십,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하 드라마였다.

토론 직전 찬반 여론은 백중세였으나 2주일 뒤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마스트리히트조약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유럽통합을 앞장서서 이끌어 온 미테랑 개인의 승리였다.

그가 퇴임 다음 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 시내 사저를 찾아 조문하고, 여름휴가를 이용해 일부러 자르낙을 찾았다. 특파원 시절 송고한 수많은 기사의 주인공이었던 뛰어난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을 나름대로 표시한 것이다.

코냑을 마시는 방법은 독특하다. 바닥이 펑퍼짐하게 둥근 글라스에 술을 따라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가며 체온으로 데운 뒤 한 모금 입에 물고 혀로 굴리며 향기와 맛을 음미하다 서서히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코냑 음주법이다. 별세하고 10년 후에도 높은 평가를 받는 미테랑은 코냑 같은 지도자다.

집권당도 납득하지 못하는 개각을 하고, 당 의장이 장관 제의를 덜컥 받을 정도로 ‘은덕’을 갈망하고 있는 집권당 소속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대접하면서도 설복시키지 못 하는 우리 대통령. 체온으로 데우고(국민에게 다가가고), 맛과 향기를 음미하고(국민의 뜻을 파악하고), 서서히 마시는(신중하게 정책을 시행하는) 코냑 같은 지도자가 될 수는 없을까.

하긴 한국 주당은 코냑을 폭탄주로 만들어 단번에 벌컥 마셔 버린다. 그 음주법에 그 대통령인가.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