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동아연극상 대상 수상작 ‘용호상박’의 희곡을 쓰고 연출한 오태석 씨. 한평생 연극만 한 것에 대해 그는 “바보 같아서”라며 웃었다. 홍진환 기자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제42회 동아연극상이 10년 만에 최고상인 대상 수상작을 냈다. 17일 발표된 수상작은 목화레퍼토리컴퍼니의 ‘용호상박(龍虎相搏·사진)’. 대상 수상작이 나온 것은 1996년 ‘문제적 인간 연산’ 이후 처음이다. ‘용호상박’은 연출상(오태석)과 연기상(전무송)도 함께 수상했다. ‘용호상박’은 올 2월 서울예대 극작과 교수에서 정년퇴임한 오태석(66·극단 목화레퍼토리 대표) 씨가 퇴임 기념작으로 지난해 말 단 9일간 무대에 올렸던 작품이다.》
퇴임 기념작으로 세 번째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거머쥐며 이 부문의 역대 최다 수상 기록까지 세운 그를 16일 대학로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만났다.
소감을 묻자 그는 “기분이 참 좋다” “감사하다”며 특유의 소년 같은 맑은 웃음을 연방 터뜨렸다. ‘난해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그의 예전 작품들과 달리 ‘용호상박’은 오태석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쉽고’ 또 ‘짧게’(1시간 10분) 쓰인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속상하다가 포기한 거지. 아우성 쳐봐야 (관객에게) 울림도 없고…. 사실, (뭔가 말하고자) 아우성치려다 보면 목에 힘도 주게 되고, 그렇죠. 메시지를 넣으려고 애를 쓰다보면 조바심이나 걱정이 들어가고. ‘용호상박’은 그냥 구경하시는 분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죠.”
그는 웃으며 ‘포기’라고 표현했지만, 오히려 심사위원단은 그 점에 주목했다. “힘을 빼고 소박하게 설명하는 원숙미가 돋보이는 작품” “여유와 유머를 갖고 메시지를 잘 녹여낸 수작” 등이 대상 선정 이유였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그가 빚어내는 검은색은 그냥 검은색이 아니다. 모시빛깔처럼 고운 검붉은색, 자주색들이 겹치고 또 겹쳐져서 만들어낸 검은색 같다. 그래서 한 겹씩 벗겨 보면 또 다른 색깔이 드러나는, 그런 세계를 그는 펼쳐 보여 준다.
‘용호상박’도 ‘형제간의 우애’에 관한 작품이지만, 겹을 하나씩 들춰보면 분단 상황까지도 담아낸 작품이다.
그는 올해로 연극 외길 인생 46년째를 맞는다. 연극의 어떤 점이 매력일까?
“대통령이나 거적 깔고 앉은 사람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 똑같죠. 하지만 연극 무대에서만큼은 시간과 공간을 이동할 수 있어요. 눈앞에서 숨 쉬면서 말로 전달하는 연극은 활자와 달리 요즘 젊은이들이 체험하지 못한 시절들을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재현해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가 연극에서 추구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 순화. ‘말은 곧 우리의 생각’이라는 점에서다. 또 하나는 앞세대가 살아온 이야기를 뒷세대에게 들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역사의식’이다.
“난 사람들이 머릿속에 문이 잠겨 있는 여러 개의 방들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앙드레 지드가 열쇠가 되어 열리는 방, 도스토예프스키가 열쇠가 돼 열리는 방….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한번도 열리지 못해 방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방도 있겠죠. 누가 내 작품을 열쇠 삼아 머릿속의 어떤 방을 연다면 그 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번 수상을 기념해 그는 ‘용호상박’을 다시 무대에 올릴 생각이다.
시상식은 2월 2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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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심사평 - 한국적 심성 살린 ‘용호상박’ 분단비극 잘 녹여내
동아연극상 대상 수상작인 ‘용호상박’은 범굿의 형식을 틀거리로 한국적인 심성과 풍정을 한껏 살리면서도 강대국 사이에 낀 분단 조국이라는 현실 발언을 놓치지 않은 수작이다. 특히 그동안 과잉되었던 오태석 특유의 미로적 구성과 덧붙이기가 정리되면서 단순성과 자연스러움이 고졸미(古拙美)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중평이었다.
희곡상 역시 오랜만에 수상자를 냈다. 고려시대 항몽 투쟁을 배경으로 한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린 이윤택의 희곡 ‘아름다운 남자’는 근래 보기 드물게 큰 사유와 시어의 아름다움이 결합된 품격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얻었다.
연기상에는 ‘용호상박’에서 강자들의 비위를 살피며 현실을 영리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국인의 모습을 감칠맛 나게 그려냈던 전무송과, ‘벽 속의 요정’에서 6·25전쟁 무렵부터 40년을 숨어산 아버지를 지켜보는 가족을 일인 다역의 변신연기로 눈부시게 표현한 김성녀가 선정됐다. 신인 연기상은 ‘아름다운 남자’에서 바이칼에서 온 유혹녀에서 인간적으로 성숙해가는 여인을 그려낸 김소희와,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에서 천덕꾸러기 여인의 생존본능을 뛰어난 리듬감으로 소화해낸 염혜란에게 돌아갔다. 무대기술상은 ‘고양이 늪’, ‘떼도적’ 등의 이태섭, ‘신개념 연극상’은 체호프 원작에 새롭게 접근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벚나무 동산’이 받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특별상은 변함없는 정신력과 자기훈련으로 작년 ‘강 건너 저편에’ ‘꽃사슴’ 등에서 후배 연기자의 귀감이 되는 탁월한 연기를 보여 준 백성희 선생께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김방옥 동아연극상 심사위원·연극평론가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