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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경미]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입력 | 2006-01-18 03:04:00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을 패러디한 유머가 유행한 적이 있다. 낙관주의자는 ‘뛰는 놈도 언젠가는 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전망하지만 비관주의자는 ‘나는 놈도 언젠가는 뛸 수밖에 없다’고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한다.

최초로 비행 실험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는 ‘나는 놈은 우리가 처음이다’고 자신하고, 자유낙하 실험을 통해 모든 물체는 질량과 상관없이 동시에 땅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 낸 갈릴레이는 ‘뛰는 놈이나 나는 놈이나 똑같이 도착한다’고 주장한다. 착취 개념에 집착한 마르크스는 ‘뛰는 놈은 나는 놈에게 착취당한다’며 피해의식에 빠지고, 진화론자인 다윈은 ‘뛰는 놈이 진화하면 나는 놈이 된다’고 한다. 이 유머의 압권은 약장사 버전이다. ‘이 약 한 병만 먹어 봐. 뛰는 놈도 날 수 있어.’

이 유머가 나름대로 생명력을 갖는 것은 그 속에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상황이 관점과 인식의 틀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포착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는 점이다.

‘줄기세포 파문’만 해도 그렇다. ‘나는 놈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공언할 한국판 라이트 형제를 만들려던 정부의 ‘황우석 프로젝트’는 국민에게 상실감만 안긴 채 블랙코미디로 끝나 가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학 지식수준을 높여 준 교육 비용으로 국고를 엄청나게 축낸 셈이 됐다. 그러나 황우석을 살리자는 목소리도 여전히 만만찮은 모양이다.

최근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과 월스트리트저널은 ‘2006년 경제자유지수 보고서’를 냈다. 한국의 경우 지수가 약간 높아졌지만 순위에는 변동이 없고, 정치와 경제의 변덕성(volatility) 때문에 경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정부 기관들의 경제 관측은 장밋빛에 가깝다. 수출 증대와 주가 상승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해 경제가 바닥을 치고 상승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나는 놈도 뛰게 될지 모른다’는 비관주의자의 우려와 ‘뛰는 놈이 곧 날게 될 것이다’는 낙관주의자의 기대를 동시에 보는 듯하다.

비관주의자는 자유지수가 약간 높아졌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찾고,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 어떨까. 반면에 낙관주의자는 ‘정치와 경제의 변덕성’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줄일 방도를 찾는 데 앞장서면 어떨까.

정부의 경제 정책은 나는 놈을 더 빨리 날게 하면서 뛰는 놈도 함께 가속도를 내도록 하는 윈윈 전략보다는 ‘나는 놈이나 뛰는 놈이나 동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듯하다. 그래서 ‘뛰는 놈은 나는 놈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상실감을 자극하여 나는 놈의 발목을 잡는 경향이 없지 않다.

코드 인사의 결정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보건복지부 장관 낙점은 ‘장관이 진화하면 대권 후보가 된다’는 다윈식 믿음의 산물일까.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개정 사립학교법의 경우 약장사 버전을 떠올린다. ‘사학법만 발효돼 봐, 부패 사학은 모두 척결할 수 있어.’

정부 요직에 닮은꼴 인물을 기용하고, 그중 어떤 사람은 비판적인 신문을 ‘독극물과 불량식품’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가 생각난다. 이 학파는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수는 두 수의 조화로운 비(比·ratio)로 표현할 수 있는 ‘유리수’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인 피타고라스의 정리(定理)에 의해 두 수의 비로 표현되지 않는 ‘무리수’를 발견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신들의 믿음에 위배되는 무리수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으나 학파의 일원인 히파수스는 무리수가 존재한다고 양심선언을 한다. 결국 피타고라스학파의 미움을 산 히파수스는 배 위에서 바다 속으로 던져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는 일종의 야사(野史)가 전해져 온다.

피타고라스학파가 히파수스처럼 다른 목소리를 내는 다른 색깔의 인물을 사장(死藏)시키지 않고 포용하는 성숙함을 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이런 아쉬움은 최근의 공직 인사를 비롯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을 보면서도 절실해진다.

박경미 객원논설위원 홍익대 교수·수학교육 kpark@hongi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