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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하준우]단식과 스트레스

입력 | 2006-01-20 03:03:00


골프를 즐기는 재미 교포가 한국인 몇 명과 미국 골프장에 갔다. 그는 그린 위에서 먼 거리의 퍼팅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함께 골프를 치던 사람들은 “죽인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음 홀부터 그의 샷과 퍼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라운딩을 마친 뒤 식사를 하면서 그 이유를 물었다. 어릴 적 이민을 가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한 재미 교포는 죽인다(kill)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는 모른다. 이 재미 교포는 말 한마디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한두 마디의 말보다 더 심한 만성적인 사회적 스트레스는 사람의 면역체계를 파괴시킨다. 매일 16시간 동안 물과 음식이 없는 작은 관에 가둬 육체적 긴장을 준 쥐보다 매일 2시간씩 공격적 성향의 쥐가 있는 우리에 가둬 사회적 스트레스를 준 쥐가 박테리아에 노출됐을 때 죽을 확률이 두 배나 높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죽음이란 생물이 항상 피하고 싶은 가장 가혹한 사태다. 움직일 수 없는 나무도 “죽인다”는 말을 들으면 움찔한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죽음은 사안의 중대성을 판단하거나 호소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미국이 이라크전 미군 전사자가 2000명이 넘으면 반전 시위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해 전전긍긍하는 것은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스스로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보는 이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사람도 있다. 외줄타기를 하는 서커스 단원이나 안전띠를 매지 않고 빌딩 벽을 오르는 ‘거미 인간’은 자칫 실수를 하면 죽거나 중상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모험은 성공을 목표로 한 것이며 죽음에 다가가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다. 사회적 문제와 연관돼 단식(斷食)을 하는 이들도 이 부류다. 단식은 원래 종교적 수행 수단이지만 이제는 사회적 약자의 항의와 저항 수단이기도 하다. 단식은 진행 과정 자체가 몸을 갉아먹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졸이게 만든다.

경남 양산시 천성산 지킴이 지율(48) 스님이 다섯 번째 단식을 하고 있다. 벌써 110일을 훌쩍 넘겼다고 한다. 그는 5일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기는 했으나 치료를 거부한 채 단식을 고집하고 있다. 지난해 초 100일간의 4차 단식은 큰 파장을 일으켜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원효터널 공사를 중단시키고 환경영향 공동조사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지율 스님의 이번 단식은 혼란스럽다. 그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천성산 대책위·천성산을 위한 시민종교단체연석회의의 한 관계자는 “지율 스님이 요구 사항을 내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대국민 호소문은 생명 평화와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한 생명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은 이에게 지율 스님의 단식은 스트레스다. 지율 스님은 4차 단식을 마치면서 글을 통해 “많은 분께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고 말했다. 환경은 인간의 생명과 평화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타협을 거부하는 근본적 생태주의자 지율 스님에게는 마뜩하지 않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천성산 이외의 생명과 평화도 중요하다. 자연이란 생명을 위해 인간의 생명을 내놓으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하준우 사회부 차장 hawoo@donga.com